사회문화

성리학의 그림자, '정답 사회'를 넘어

상계동백곰 2025. 7. 9. 11:17

조선은 끝났지만, 성리학은 끝나지 않았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성리학 사회의 모습을 현재 한국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기론(理氣論)과 격물치지(格物致知)로 대표되는 성리학은 500년간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그 수명을 다한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유산은 여전히 우리 삶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가족의 가치, 공동체 의식, 교육을 중시하는 문화 등 우리가 아름답게 여기는 많은 가치들이 성리학과 부합합니다. 그러나 성리학을 숭상하던 조선왕조가 식민지배라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듯이, 성리학의 부작용 또한 여전히 한국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정답 사회'의 기원: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여러 부작용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정답'을 요구하는 문화입니다.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이(理)'는 인간과 세상에 하나의 참된 모습이 있다는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에 부합하는 사람을 군자(君子)라 하고, 부합하지 못하면 소인(小人)이라 합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자연스럽게 위계질서를 정당화했고, 계급을 중시하던 조선이 정작 식민지배를 받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귀족령' 등으로 갑오개혁으로 사라졌던 계급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고, 이는 한국전쟁을 통해 지역사회가 붕괴되고 계급을 인식하는 주체들이 흩어지면서야 겨우 표면적으로 해소될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계급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단순히 시험에서 정답을 찾는 것을 넘어 각자의 삶에 '정답'이 있다고 믿는 문화가 뿌리 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획일적 사고방식은 급격한 산업화와 압축 성장을 거치며 '물질적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와 결합하여 더욱 강력한 사회적 압박으로 작동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조금씩 완화되고 있지만, 어떤 직업을 갖고 어디에 살며 얼마나 벌어야 하는지가 인생의 정답처럼 여겨지고, 이에 어긋나면 실패한 삶처럼 매도하는 분위기는 여전합니다.

 

결국, 공동체의 붕괴를 낳다

이러한 압박은 개인의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집단 무의식으로 작동하며 심각한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성리학에서 그토록 중시하던 공동체가 저출산으로 붕괴되는 현실입니다. '정답'으로 여겨지는 삶의 기준(안정된 대기업, 수도권의 아파트 등)을 충족시키기 위한 경제적, 심리적 부담이 개인과 가정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강요하는 획일적인 성공의 잣대가 역설적으로 공동체의 존립 기반인 다음 세대의 탄생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를 기점으로 사회 각 영역에 나타나는 각종 도덕성 논쟁도 성리학의 유산입니다. 법과 도덕이 별개의 잣대가 되어 서로를 옭아맵니다. 유명인에 대한 가십거리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이는 곧바로 일상에서의 평가 도구가 됩니다. 온라인상의 소모적인 논쟁으로만 끝나지 않고, '나 편하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이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결국 모두가 선망하는 수도권으로, 강남으로 몰려드는 현상에 일조합니다.

 

'모든 사람은 성인이다': 양명학에서 찾는 해법

지배 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은 끝났지만, 책임지지 않는 문화적 관성으로 우리 삶에 녹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리학의 뒤를 이은 양명학(陽明學)을 이제 와서 그대로 수입하자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유교가 전통문화의 축을 이루는 것은 맞지만, 이를 현재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자본주의이자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양명학에서 주장하는 '길거리의 모든 사람이 성인(滿街皆聖人)'이라는 가르침에 담긴 정신만큼은 이 시대의 한국이 깊이 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리학의 가장 큰 문제가 사람의 '참값'을 정해두고 그 기준으로 끊임없이 재단하는 것이라면, 이 가르침은 그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성리학적 마인드는 길에서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을 보고 '노력이 부족해서 저런 일을 하는군'이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반면 양명학적 마인드는 '저 사람 또한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존귀한 존재'라고 여길 것입니다. 저는 요즘 말로 '저런 일을 해도 사실은 건물주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람을 대하려 노력합니다. 겉모습으로 타인의 가치를 함부로 추측하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이제는 '정답'이 있다는 착각부터 버려야 할 때

이렇게 되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을 것입니다. 당장 경로석이 없어지고, 가족에 대한 중요도가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독한 집단주의 문화에 너무 오랫동안 젖어 있었습니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반드시 성리학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보편적 가치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한국의 고유한 특징에 맞춰 성리학을 발전시킨 것은 수많은 선현의 공이지만, 이제는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합니다.

그 시작은 우리 안에 내재된 성리학의 그림자, 즉 '정답 찾기' 문화부터 깨부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