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지정제 폐지, 이제는 결단할 때가 되었습니다
당연지정제, 이제는 논의할 때입니다
당연지정제는 국민 대부분에게 생소한 단어입니다. 의료기관을 운영하거나 정책에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니라면 처음 듣는 제도일 수도 있습니다. 의료계 종사자조차도 '그런 제도가 있다'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이 제도가 보건의료 체계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깊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연지정제는 한국 건강보험의 핵심 구조이며, 현재 의료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제도입니다.
당연지정제란 무엇인가?
당연지정제는 모든 병원과 의원, 약국이 국민건강보험 진료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제도입니다. 덕분에 국민 누구나 전국 어디서든 건강보험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한국은 의료 접근성과 비용 측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우수한 의료체계를 구축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의료기관의 진료 선택권을 제한하며, 민간 사업자에게 특정 가격으로 서비스 제공을 강제하는 구조이기도 합니다. 모든 병원이 정해진 가격에 진료해야 하는데, 그 가격은 시장가보다 현저히 낮은 경우가 많습니다. 원가보전률은 대체로 70% 미만에 그치며, 나머지는 병원이 부담하거나 비급여로 충당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는 공공성을 이유로 이 제도를 합헌으로 판단해왔습니다.
다른 업종으로 살펴본 당연지정제
이 제도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업종에 적용한 비유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법률사무소에 당연지정제가 적용된다면, 모든 형사사건 수임료를 평균의 60% 수준으로 강제하고, 그중 일부는 의뢰인이, 나머지는 국가가 지불하며, 국민들은 매달 법률세를 납부하는 시스템이 될 것입니다.
빵집에 적용한다면, 정부가 단팥빵과 롤케이크 가격을 정하고, 모든 빵집은 이 가격에 판매해야 하며, 소비자는 일부만 부담하고 국가가 빵값의 상당 부분을 보전해주는 방식이 됩니다.
이는 실제 상황을 단순화한 비유이지만, 현재 병의원에서 발생하는 진료비, 본인부담금, 건강보험공단의 급여지급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병원이 늘어나는데 왜 문제냐'는 질문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병원도 많고, 의사들도 고소득인데 무슨 문제냐'고 반문하십니다. 실제로도 많은 병원이 생기고 의사들이 잘 산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비급여 항목의 수익성과 실손보험에 의존한 구조 덕분이었습니다. 급여 진료만으로는 병원 운영이 불가능했고, 미용, 검진, 특수 치료 등 비급여 항목을 통해 운영을 유지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금리 시대가 끝나고 고금리와 경기침체가 겹치자, 실손보험을 운영하는 보험사들이 손해율을 이유로 지급을 거부하거나 삭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보험에서의 한방 진료 지급 제한도 같은 맥락입니다. 환자는 그대로인데 지급 구조만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비급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부도 건강보험 재정 위기를 이유로 중증, 간병, 요양 분야만 보장하고, 나머지 질환이나 증상에 대해서는 병원이든 환자든 각자 책임지도록 시스템을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응급실 남용 억제, 약국 중심의 경증치료 확대, 의료 접근성 제한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급여진료는 줄고, 병원도 줄어든다
물가와 인건비가 오르는 동안, 병원에 지급하는 진료비(수가)는 사실상 동결되었습니다. 급여진료는 손이 많이 가면서도 수익은 적습니다. 예전에는 비급여로 어느 정도 보완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비급여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입니다. 특히 1차 의료기관인 동네의원은 점점 버티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한 지역(인구 100만 기준)에 과목별로 급여진료를 유지하는 병원이 1~2개 정도 남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이미 치과는 급여진료만 하는 곳(틀니·충전)과 고가 비급여(임플란트) 위주로 분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급여진료를 강제하면서 비급여 가격까지 통제하면, 결국 병원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임플란트를 잘하던 병원이 급여진료 때문에 문을 닫게 되면, 오히려 경쟁이 사라져 임플란트 비용도 더 오르게 됩니다.
의료개혁의 진짜 논점: 당연지정제 vs 의료의 질
국가는 의료비를 줄이기 위해 비급여 가격 통제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급여는 강제하고, 비급여는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사회주의 의료'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적은 비용으로 같은 질의 의료를 유지하길 원하지만, 의료 역시 인적 자원과 기술의 산물입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의사에 대한 보상이 낮아 의대보다 공대를 선호합니다. 의료의 질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중증질환에도 병원 가기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과거 IMF 이전에는 공대, 건축학과 같은 빠른 취업이 가능한 전공이 더 선호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결국 제도는 그 사회가 얼마나 의료를 존중하느냐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대안은 있는가?
이 글은 당연지정제를 전면 폐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종합병원, 상급종합병원에 대해서는 유지하되, 동네의원에 대해서만 예외를 허용하자는 제안입니다. 어차피 이미 비급여 위주로 운영되는 의원들이 많고, 국민들도 현실적으로 그에 익숙해진 상태입니다.
급여진료를 계속 강제하면서도 비급여까지 간섭하면, 결국 남는 병원이 없게 됩니다. 그 결과 의료 접근성은 떨어지고, 남은 의료기관은 대형화되며, 국민의 선택권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은 의료 접근성, 비용, 질이라는 세 가지 병립하기 어려운 요소를 동시에 이뤄낸 듯 보였지만, 그것은 경제성장이 만든 착시였습니다. 불편하지만 이제는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입니다.
이 중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