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책

부유세를 내던 부자들이 파업을 한다면?

상계동백곰 2025. 10. 7. 05:53

재정위기와 분노가 소환한 부유세

 

프랑스의 재정적자가 심화되면서 긴축 재정을 시행하게 되자 총리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사임하고 프랑스 각지에서 시위가 격해지는 등 사회적 대립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생각하는 방법은 연금 수령 연령을 미루고 공휴일을 줄이는 등 공공지출을 줄이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에 반대하여, 과거 부유세 등 소위 '부자 세금'을 줄여서 세수가 감소했기 때문에 지금의 문제가 생겼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들은 초고소득 부자들을 상대로 다시 세금을 걷는 것이 단순히 세수를 확보하는 것을 넘어, 극심한 불평등이 야기하는 사회적 갈등 비용을 줄이고 조세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프랑스 정도 되는 국가가 재정위기를 논할 정도면 사실 하루이틀의 일은 아닙니다. 크게는 유로화 통합 이후 프랑스 프랑을 썼을 때 구사할 수 있었던 각종 통화정책이 묶이고, 프랑스 내 생산시설을 중국 등 제3국으로 이전하면서 정작 복지 수준은 그대로 가져가는, 그래서 적자가 안 날 수 없는 구조를 꽤 오랫동안 유지했습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대마불사', 즉 프랑스가 망하면 EU가 망하니 EU에서 구제해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부유세는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분야인 점이 크고, 실제로는 수많은 요인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것입니다.

 

국경을 넘는 부(富), 발 묶이는 세금

 

부유세는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우가 많지만, 이미 현대 조세 체계에서는 소득별 누진세가 기본적으로 작동합니다. 국가별로  누진 비율의 차이가 있지만, 소위 말하는 조세부담률 기준으로도 프랑스는 이미 '걷을 만한 사람에게 다 걷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미 부유세를 거뒀다가 부자들만 해외로 탈출해서 세수 확보가 생각보다 용이하지 않다는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현금이나 주식 등은 국경을 넘기 쉽습니다. 움직이는 자산인 동산과 이에 반대되는 부동산으로 자산을 나누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현금은 대놓고 유동성이라고 합니다. 액체처럼 넘실넘실 형태를 잘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유럽처럼 각 국가가 붙어 있는 경우에는 재산을 옮길 필요도 없습니다. 부자들에게 친화적인 세금 제도를 운영하는 곳으로 국적을 옮기면 그만입니다. 최근에는 이탈리아 밀라노가 패션뿐만 아니라 부자들의 세금 관리처로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부유세를 내던 부자들이 일제히 파산 신청을?

 

이미 역사적 경험들이 있지만, 만약 정말 빈틈없이 국가와 국민들이 부자들을 옭아매서 부유세를 빠짐없이 내게 하고 해외로도 못 가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인신구속이나 다름 없는 가정이지만, 부유세가 마냥 좋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부유세를 강제로 내게 된 부자들은 우선 저항을 하겠지만, 여의치 않다는 것을 느끼면 당분간은 순응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제도를 만든 정치 체계를 고치려고 할 것입니다. 대중들은 시위에 나서고 소리를 지르고 쉼 없이 도로를 이동해야 하지만 부자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게 조용하게 정치권에 힘을 씁니다. 합법적인 로비, 언론사나 싱크탱크에 대한 자금 지원을 통한 여론 형성, 주요 정치인에 대한 후원 등 그 방법은 다양하고 효과는 확실할 것입니다. 세금을 낸 만큼 사회·정치적인 영향력을 키워서 보상 작용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주 정밀하게 부유세만 걷도록 해서 꽤 오랫동안 세금의 일부가 되었다면 어떨까요? 프랑스의 낙관적인 경제학자가 년 33조를 부유세로 걷을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는 다들 도망가서 그 정도를 못 걷지만, 만약 도망 못 가게 해서 꾸준히 걷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국내 투자를 대폭 줄이거나,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대신 기존 자산을 지키는 데만 집중하거나,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본을 해외로 이전하는 식의 '조용한 투자 파업'에 나설 것입니다. 이런 경제적 저항이 만연한 상황에서, 만약 어느 순간 부자들이 일치단결해서 파산 신청을 해서 세금을 못 내겠다고 하면 어떨까요? 갑자기 몇십조의 세금이 없어지는 데, 부자들이 못 내겠다고 하니 차상위 부자들에게 부유세를 신설해 세금을 걷을 것인지도 궁금해집니다.

 

분노를 넘어 '사회적 체력'으로

 

재정위기는 부자들의 돈을 더 걷는 것으로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알만한 국가의 재정위기는 거대한 돈의 흐름이 필요합니다. 프랑스 재정위기도 결국은 IMF에 가기 전에 유로존의 개입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에도 부유세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냉정한 판단과 별도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답답함과 분노가 정책의 이름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한국은 아직 국가부채가 높지 않지만, 가계부채와 마찬가지로 증가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빚으로 빚을 갚는 시대가 오고 있으며, 프랑스와 달리 한국은 재정위기를 연대해서 대응할 국가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대응 방법을 얘기해볼 수는 있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분노를 이용해 문제 해결이 아닌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분노는 인간의 활동 에너지이지만, 방향성이 없습니다. 그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냉철한 상황인식과 판단입니다. 한국도 관세협상 등 여러 방면에서 위기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짜증, 분노, 무기력 등 다양한 감정을 집단적으로 겪는 것을 잘 견디는 사회적 체력이 필요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