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四肢)와 체간(體幹) 경혈, 같으면서 다른 항염증 효과
침의 항염증 효과, Nature가 밝힌 구체적인 신경 경로
한의학에서 임상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고 과학적으로 활발히 연구된 치료법은 단연 침입니다. 특히 발열, 부종, 통증을 동반하는 염증 반응에 대한 침의 개선 효과는 수많은 임상가들이 경험하는 현상이지만, 그 구체적인 작용 기전은 오랫동안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명한 학술지 Nature에 실린 연구(https://doi.org/10.1038/s41586-021-04001-4)는 전침(전기침)이 어떤 경로를 통해 항염증 효과를 내는지 동물실험으로 명확히 밝혀냈습니다. 이 연구는 단순히 '효과가 있다'는 것을 넘어, '어떤 신경세포가', '어느 부위에서', '어떤 자극에 반응하여' 효과를 나타내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우리의 임상적 경험에 강력한 과학적 근거를 더해주었습니다.
사지와 체간: PROKR2 뉴런이 밝혀낸 항염증의 두 가지 경로
이번 연구의 핵심은 침 자극 부위와 강도에 따라 우리 몸의 항염증 시스템이 전혀 다른 두 가지 경로로 활성화된다는 것을 입증한 데 있습니다. 연구진은 특히 특정 감각 뉴런에 주목했습니다.
- 미주-부신 축 (Vagal-Adrenal Axis)과 사지(四肢)의 PROKR2Cre 뉴런
연구진은 'PROKR2Cre'로 표지되는 특정 감각 뉴런이 항염증 반응의 핵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뉴런들은 복부와 같은 체간에는 거의 없고, 뒷다리와 같은 사지의 깊은 근막(deep fascia), 특히 뼈를 감싸는 골막(periosteum)에 풍부하게 분포하고 있었습니다. 동물 모델의 뒷다리 족삼리(ST36) 혈자리에 낮은 강도(0.5mA)의 전침 자극을 주자, 이 PROKR2Cre 뉴런이 활성화되면서 미주신경을 거쳐 부신(adrenal gland)에서 항염증 호르몬(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 분비를 촉진했습니다. 이 경로는 호르몬을 매개하기 때문에 효과가 전신에 걸쳐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진은 유전적으로 이 뉴런을 제거(ablation)하자 낮은 강도의 전침 자극을 주어도 항염증 효과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며, 이 뉴런이 해당 경로에 필수적(necessary)임을 증명했습니다. - 척수-교감신경 축 (Spinal-Sympathetic Axis)과 체간(體幹) 자극
반면, 복부의 천추(ST25) 혈자리나 족삼리(ST36) 혈자리에 높은 강도(3.0mA)의 전침 자극을 주었을 때는 PROKR2Cre 뉴런과 무관한 다른 경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이 강한 자극은 척수를 통해 교감신경을 직접 활성화하여 염증 부위에 작용했습니다. 신경을 직접 매개하는 이 경로는 국소적이고 매우 빠르게 염증을 조절하는 특징을 보였습니다. 이 효과는 PROKR2Cre 뉴런을 제거한 동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 두 경로가 완전히 독립적임을 시사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연구는 사지의 저강도 자극은 PROKR2Cre 뉴런을 통해 전신적·지속적 항염증 반응을, 체간의 고강도 자극은 척수-교감신경을 통해 국소적·신속성 항염증 반응을 유도한다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밝혔습니다.
임상 통념을 넘어: 오수혈과 체간혈의 정교한 활용 전략
이처럼 구체적인 연구 결과는 오수혈(五輸穴)과 체간 경혈을 사용하는 우리 임상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첫째, 오수혈을 활용한 난치성 질환 치료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사암침이나 동씨침처럼 팔다리의 혈자리만으로 전신 질환을 치료하는 침법의 효과를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류마티스 관절염, 크론병, 아토피 피부염 등 만성 전신 염증 질환 환자들이 사지 위주의 침 치료에 반응하는 이유가 바로 PROKR2Cre 뉴런을 경유하는 미주-부신 축의 활성화 때문일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연구에서도 앞다리의 수삼리(LI10) 자극이 족삼리(ST36)와 마찬가지로 PROKR2Cre 뉴런 의존적인 항염증 효과를 보임을 확인했습니다.
둘째, 임상적 통념을 뒤집는 새로운 치료 전략을 제안합니다. 흔히 급성 질환에 오수혈을, 만성 질환에 체간의 혈자리를 사용하던 관행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오히려 만성·전신 염증에는 사지의 오수혈 부위를 깊고 부드럽게 자극하고, 급성 허리 염좌와 같은 국소 염증에는 체간의 혈자리를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 기전적으로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임상 적용을 위해서는 한 가지 포인트를 주목해야 합니다. 연구에서 항염증 효과는 피부 표면을 얕게 자극했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고, 신경다발이 있는 ‘심부 근막’을 자극했을 때만 유효했습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오수혈을 얕게 놓던 방식으로는 이 특정 경로를 충분히 활성화하지 못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만성 전신 염증 질환을 치료할 때는, 가는 침을 사용하되 뼈에 닿는 느낌으로 깊게 자침하여 심부 근막을 정확히 겨냥하고, 이후 약한 강도의 전침을 연결하는 정교한 방식이 더 나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이 연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우리의 임상 기술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