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하나인 줄 알았던 '연구'
연구원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 저는 '의학연구'가 단일한 하나의 흐름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논문을 찾고, 동물실험을 하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데이터를 얻는 것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여겼습니다. 국책연구원에서 6년간 사람 대상 연구를 하면서, 동물실험은 전임상, 사람 대상 연구는 임상연구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임상을 9년간 하고 나서 기초 연구를 하게 된 지금, 이 둘 사이의 간격이 상당히 크고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네트워크 약리학을 공부하며 기초연구의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동안 주로 임상연구에 몰두했던 경험과 비교해보니 흥미로운 차이점들이 보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차이점들을 살펴보고, 두 분야가 어떻게 서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제가 생각한 바를 적어보려고 합니다.
1. 현장에서 바라본 기초와 임상의 시각차
연구를 하는 한의사라도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 따라 기초와 임상에 대한 이해도가 다릅니다.
임상연구를 주로 하는 연구자들은 동물실험, 세포실험을 임상현상을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기초 실험연구자들 중에는 임상연구를 자신이 하는 연구가 잘 되어서 쭉 이어져 나가면 언젠가 할 수도 있는, 그렇지만 당장의 연구 성과를 내는 데는 필수적이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물론 이러한 시각차가 모든 연구자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들어 중개연구(translational research)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두 영역을 모두 이해하고 연결하려는 연구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에서는 임상연구자들이 기초연구자들에게 "시야가 너무 좁다"고 하고, 기초연구자들이 임상의들에게 "근거 없는 기전을 이야기한다"고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같은 주제를 놓고 연구를 하는데도 이런 일이 생기며, 이는 연구기획에서 어느 한쪽이 배제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2. 방법론적 차이: 경직성과 유연성의 대비
임상연구: 방법론의 엄격한 준수
임상연구는 정해진 방법론이 있고, 이를 엄격히 따라가야 합니다. 관찰연구든 무작위배정연구든, 통계학적 방법을 토대로 한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방법론을 임의로 변경하는 것은 거의 허용되지 않습니다. 특히 약물의 시판 허가를 얻기 위한 연구의 경우, 연구방법론을 얼마나 엄격하게 따랐는지에 대한 검증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기초연구: 목적에 맞는 방법론의 창조
기초연구 역시 권위 있고 검증된 연구 방법론들이 있지만, 자신의 연구 의도에 맞게 방법론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허용됩니다. 약물을 특정 세포나 동물에게 노출시키는 방법, 시간, 그리고 이를 검증하는 각종 수치들도 연구 목적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차이의 근본 원인: 변인통제의 중심
이러한 차이는 변인통제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기초연구는 실험에 사용하는 동물이나 세포주가 철저히 통제되어 있습니다. 실험용 쥐는 유전적으로 동일하고, 세포주도 출처와 특성이 명확히 확인됩니다. 처리하는 약물도 정량적, 정성적으로 통제됩니다. 따라서 실험방법을 변경하더라도 결과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임상연구에 참여하는 시험참가자들은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개인차가 매우 큽니다. 체중, 신장, 성별, 나이, 인종 등의 기본적인 변수들을 실험군과 대조군에서 균등하게 맞춘다 하더라도, 참가자 수가 적다면 신뢰도를 담보하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체계적 논문 고찰(systematic review)이라는, 같은 주제로 연구한 여러 논문을 통합하여 분석하는 방법이 발달했습니다. 인간의 다양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특정 현상이 일관되게 나타나는지를 검증하기 위해서입니다.
3. 목적과 지향점의 차이
임상연구: 최적의 치료 효과 추구
임상연구는 의료환경에서 최고의 효과와 최소의 부작용을 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 목표입니다. 환자를 어떻게든 잘 낫게 하고,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관상동맥이 막혔을 때 시행하는 스텐트 삽입술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좁아진 혈관을 기구로 늘리는 방법으로 개념은 단순하지만, 스텐트 삽입 후 나타나는 염증반응, 재응고 현상 등의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 약물 코팅 스텐트를 개발하거나 풍선 확장술을 병행하는 등 계속해서 방법이 발전해왔습니다.
임상연구에서는 때로 가장 근거 수준이 높은 무작위 배정 임상시험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수술이 대표적인데, 같은 환자를 대상으로 마취를 시킨 후 한쪽은 개복 이후 바로 덮고, 다른 쪽은 실제 수술을 진행하는 것은 윤리적으로나 방법론적으로나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초연구: 기전 규명을 통한 지식 확장
기초연구는 최종적으로 임상연구를 통해 약물로 인정받는 것도 중요한 성과지만, 반드시 약물 개발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여러 성분의 작용 대상, 기전, 용량, 유전자 작용 등을 규명하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건강기능식품 개별인정형 개발이나 동물 사료 첨가물로 활용되는 것도 충분한 성과로 인정받습니다.
기초연구에서도 임상 현상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며, 임상에서 잘 사용되는 것을 역으로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 끝에는 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 기전이 명확히 해석되어야 합니다. 단일성분이 해석하기 쉽고 연구도 용이하기 때문에 선호됩니다. 한약 연구가 어려운 것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화학적으로 어떤 물질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기전을 모두 또는 대부분 밝혀야 하는데, 여러 성분을 한꺼번에 사용하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규명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4. 역사적 뿌리: 서로 다른 전통에서 출발한 두 길
임상의학: 주술에서 과학으로
역사적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은 말 그대로 침상 옆에서(bedside) 이루어졌습니다. 환자가 좋아진다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 것이 의사의 사명이었습니다. 고대에는 의사 역할을 주술사, 무속인, 무당이 했습니다.
2천여 년 전에 쓰인 한의학 고전 『황제내경』에서도 이전에는 축유(祝由), 즉 기도나 굿을 해서 치료했는데 왜 지금은 하지 않는가에 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의학의 '의(醫)'라는 한자도 처음에는 아래 술 주(酒) 자리에 무당 무(巫)가 들어간 '毉'자였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타나는 공통 현상이었고, 의학이 무속에서 벗어나면서 약물이라는 뜻이 포함된 현재의 글자로 바뀌었습니다.
무속에서 약물로의 전환은 의학사의 큰 전환점이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유는 모르더라도 환자가 좋아지고 부작용이 없다면, 때로는 기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치료법도 사용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승인된 적응증과 다른 목적으로 약물을 사용하는 '오프라벨(off-label)' 처방이 그 예입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플라시보 효과도 쓰게 됩니다. 크고 복잡한 기계를 만지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 고대에 제물을 준비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주술을 외우는 것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나는 과학이고 하나는 무속이지만, 행위만 놓고 보면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나를 압도하는 것 같은 힘에 의존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실험실 연구: 연금술의 유산
실험실 연구는 연금술에서 역사적 배경을 가집니다. 연금술의 대부분은 허황된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화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가치가 거의 없다고 여겨지던 성분이 특정 질병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해 약물로 개발하게 되면, 그 가치는 수천 배, 수만 배로 뛰어오릅니다. 이는 연금술이 지향했던 바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실험실에서 확인된 성분의 기전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대량 생산 시 해당 성분의 화학적 특성과 생물학적 반응을 명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수만 명, 수십만 명이 복용할 때 나타나는 다양한 반응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필요에서도 비롯됩니다.
5. 융합을 향한 여정: 서로를 향해 나아가는 두 세계
한의학 이론을 구성하는 음양오행도 처음부터 통합된 체계는 아니었습니다. 음양 이론을 하는 사람과 오행 이론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고, 점차 공통점을 찾아가면서 음양오행이라는 통합 이론 체계가 형성되었습니다. 현대 의학의 토대가 되는 분자생물학 역시 화학과 생물학의 결합체입니다.
의학은 '과학'이라는 이름을 선호하지만, 그 근간은 여전히 환자를 안정시키는 데 있습니다. 기전보다는 효과가 우선됩니다. 아스피린의 항혈전 작용은 실험실을 넘어 백만 명이 넘는 연구 참가자에게서 도출된 높은 근거 수준을 지닌 발견입니다. 그러나 임상 현장의 의사들은 아스피린으로 인해 혈액이 묽어져 수술 시 지혈에 문제가 생기는 점을 더 걱정합니다.
맺으며: 새로운 의료 패러다임을 향하여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 두 분야의 결합이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요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왜 낫는지' 설명을 듣고 싶은 원초적 궁금증과 불안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복잡한 인간의 생리와 병리를 꿰뚫어서 건강 장수의 가능성을 높이려는 인간의 근본적 욕망이 발현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은 그동안 의료 현장에 많은 투자를 해왔습니다. 고도로 훈련받은 의사들이 언제 어디서든 첨단 장비로 진료를 제공하니, 병원에 가면 당연히 나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소위 '의료개혁' 이후 중병에 대해서만 병원 이용이 가능하고 나머지 질환에 대해서는 개인이 알아서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기초와 임상 연구의 융합은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단순히 증상을 완화하는 것을 넘어서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치료가 더욱 각광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환자들이 자신의 건강을 능동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시대에, 과학적 근거와 임상적 효과를 모두 겸비한 치료법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초연구와 임상연구는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했지만, 인간의 건강이라는 공통 목표를 향해 점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 두 세계의 진정한 융합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더욱 효과적이고 안전한 의료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