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병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했고, 인간의 변화는 곧 질병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기후변화, 기술발전, 사회체제의 변화는 인류의 삶을 바꾸었고, 질병의 양상 또한 그 흐름을 같이했습니다. 특히 최근 100년간의 변화는 이전 수천 년을 압도할 만큼 거대했으며, 질병의 형태와 이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 역시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현대 보건의료의 패러다임을 '확정적 치료(Definitive Treatment)'와 '확률적 건강관리(Probabilistic Health Management)'라는 두 가지 분석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확정적 치료가 원인이 명확한 질병을 진단하고 표준화된 방법으로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확률적 건강관리는 명확한 질병이 없는 상태에서 미래의 질병 발생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모든 예방 및 관리 활동을 의미합니다. 현대 사회는 전자의 시대에서 후자의 시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진단 기술의 역설: 명확한 질병은 사라지고 불확실성이 커지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건강 문제에는 '명확한' 질병명이 붙었습니다. 임상 증상만으로 '늑막염'이나 '신장염' 같은 진단이 내려지기도 했고, 환자들은 자신의 아픈 상태를 설명해 줄 구체적인 병명을 원했습니다. 질병의 원인과 결과가 비교적 뚜렷하게 인식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실손보험 도입과 진단기기의 발전은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엑스레이, 혈액검사 등 객관적인 데이터가 진단의 필수 조건이 되면서, 의사들은 예전처럼 쉽게 확정적인 진단을 내리기 어려워졌습니다. 진단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정상'과 '질병' 사이의 거대한 '회색지대(Gray Area)'를 드러낸 것입니다.
여기에 영양상태 개선, 노동환경 변화 등 전반적인 삶의 질 향상은 질병의 특성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뇌졸중, 심장마비처럼 과거에 죽음을 의미했던 질병들은 이제 응급의학의 발달로 '관리 가능한' 영역으로 들어왔고, 암만이 '확정적 치료'가 필요한 최후의 질병처럼 남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질병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치료에서 관리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건강기능식품과 라이프스타일: 확률을 관리하는 시대의 풍경
이제 대중의 관심은 암 같은 큰 병을 피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데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건강기능식품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입니다. 과거의 '영양제'가 결핍을 보충하는 개념이었다면, 지금의 건강기능식품은 질병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인체 기능의 유지를 통해 ‘건강할 확률’을 높여준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약이 아닌 식품의 형태로 꾸준히 복용하며 미래의 불확실한 위험을 관리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물론 건강 확률을 높이는 왕도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좋은 음식, 충분한 휴식, 적절한 운동, 그리고 스트레스 관리입니다. 하지만 확정적 치료와 달리 확률적 건강관리에는 정해진 ‘표준 치료법’이 없습니다. 토마토와 블루베리 중 무엇이 나에게 더 나은지, 수영과 달리기 중 어떤 운동이 더 효과적인지는 개인마다 다르며, 그 효과를 명확히 측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뭔가 좋은 것 같지만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기 어려운 것’, 이것이 바로 확률적 건강관리가 가진 맹점입니다.
미래 의료의 갈림길: 인공지능과 의사의 역할 재정의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미래 의료의 방향성에도 큰 질문을 던집니다. 인공지능(AI)은 영상 판독이나 데이터 분석을 통해 '확정적 치료' 대상을 규정하고 치료법을 제시하는 데 이미 인간 의사를 능가하는 능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률적 건강관리'는 AI에게도 어려운 영역입니다. 데이터가 모호하고, 성공의 기준을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건강 상태를 격투게임의 에너지 게이지처럼 보여줄 수는 있겠지만, 그 게이지가 0이 되는 순간이 질병의 발생과 정확히 일치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확률의 영역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확정적 치료'의 시대가 저물고 '확률적 건강관리'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인류가 질병을 '정복의 대상'에서 '평생 관리해야 할 동반자'로 인식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최근 불거지는 의사와 정부 간의 갈등 역시, 질병 치료 전문가로서 의사의 역할이 관리와 돌봄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나타난 충돌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구촌이 전반적으로 고령화되고 삶의 수준이 향상되면서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이는 의료계를 넘어 사회 전체 시스템과 개인의 삶의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거대한 전환점이며,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시기입니다.
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