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목민적 유연성의 시대
'시스템이 엉성하다', '변화가 급격하다'는 평가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였습니다. 다른 선진국들이 견고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동안, 한국은 마치 유목민처럼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권 교체 시마다, 때로는 한 정권 내에서조차 조세·교육·복지·국방 등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정책들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었습니다. 국민들은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정부가 뭔가 일하고 있다'는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이기도 했으며, 이는 분명 한국 사회만의 뛰어난 적응력이자 유연성으로 작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유연성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한 정권에서 추진한 정책이 다음 정권에서 완전히 폐기되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과 불확실성은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이 되기도 했습니다. 제도의 연속성 부족은 장기적 계획 수립을 어렵게 만들었고, 예측 불가능성은 사회 전반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습니다.
국채와 정책 자율성의 상관관계
이제 한국 사회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고 있으며, 그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국채가 있습니다.
과거 한국의 국채는 상대적으로 낮은 비중을 차지했고, 그나마도 국민연금 등 공공기관이 주요 보유 주체였기 때문에, 국민적 합의만 있으면 정부는 상당한 정책적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진국 진입과 함께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복지 확대, 급속한 고령화, 사회간접자본 유지·보수 등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기 시작했고, 경제성장률은 점점 둔화되어 세수 증가율이 제한되면서 국가부채는 필연적으로 늘어났습니다. 현재 한국은 연간 40조 원이 넘는 국채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이 부담은 앞으로 더욱 커져서 50조, 70조, 100조라는 숫자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국채가 정책 유연성에 직접적인 제약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국채 투자자들은 무엇보다 국가 정책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중시합니다. 정부가 시장에 불확실성을 증가시키는 정책을 발표하면, 투자자들은 즉시 채권을 매도할 수 있고, 이는 국채 금리 급등으로 이어집니다.
실제 사례로는 2022년 영국에서 리즈 트러스 총리가 대규모 감세 정책을 발표했을 때, 국채 금리가 급등하며 결국 총리 사임으로까지 이어진 것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이라 불리는 투자자들의 집단 행동이 정부 정책을 좌우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를 개인의 삶에 비유하면, 대출을 많이 받은 사업자는 함부로 사업 방향을 바꾸거나 불필요한 지출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금융기관이 사업자의 경영 방향에 따라 자신이 빌려준 대출금의 규모와 금리를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여서 국채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정책 운용이 필수가 됩니다.
'재미없는' 안정성이 주는 선물
국채 증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할 뿐만 아니라 이자 비용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 변화가 가져올 긍정적 효과라도 확실히 챙길 필요가 있습니다.
정책 유연성의 제한은 역설적으로 정책의 안정성과 일관성 향상을 의미합니다. 정권 교체 시마다 뒤바뀌는 정책이 아닌, 장기적 관점에서 일관되게 추진되는 정책은 사회 전반의 불확실성을 크게 줄여주게 됩니다.
기업들은 예측 가능한 정책 환경에서 장기 투자 계획을 세울 수 있고, 국민들은 갑작스러운 제도 변화로 인한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줄여 궁극적으로 국가 경쟁력 향상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책의 연속성이 확보되면서 장기적 국가 과제들, 즉 저출산·고령화 대응, 기후변화 적응, 기술혁신 등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접근이 가능해집니다.
성숙한 사회로의 전환
한국은 이제 과거의 '유목민적 역동성'을 뒤로하고, 선진국 수준의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국채 증가라는 부담스러운 현실이 오히려 이러한 전환을 가속화하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과거의 급격한 변화가 '흥미진진했을지' 모르지만, 성숙한 사회는 '재미없더라도'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 경로를 선택해야 합니다. 국채라는 제약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한국 사회를 더욱 체계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거쳐야 할 성장통일지도 모릅니다.
'경제현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수동에서 본 인플레이션의 또다른 얼굴, ‘Accessflation’ (4) | 2025.08.06 |
---|---|
잘파(ZAlpha) 세대의 경제학 : 재화와 서비스를 넘나드는 효용 평가 (1) | 2025.07.18 |
다이소에 미국 물건이 들어온다면? (1) | 2025.05.18 |
한 종목 몰빵 투자가 위험한 이유 – 켈리공식으로 본 분산투자의 수학적 근거 (1) | 2025.05.16 |
코리아 디스카운트, 구조의 문제일까요? 선택의 결과일까요? (0) | 2025.04.21 |
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