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답 사회의 성공, 그리고 명백한 한계
지방 소멸과 인구 감소라는 사회 변화는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정부가 수백조 원을 투입하고 전담 부서까지 만들며 이 문제와 씨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백약이 무효라는 냉소 섞인 공감대만 남았습니다. 이제는 '다른 나라도 인구가 준다더라', '일본 빈집 문제에 비하면 우리는 낫다'는 식으로 체념 섞인 적응을 모색하는 분위기마저 감지됩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수단이 모두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문제의 근저에 깔린 우리 사회의 운영 체계, 즉 '사상'을 점검해야 합니다. 제 진단은 한국 사회가 사상의 발전 단계에서 아직 모더니즘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은 종교와 왕권이라는 낡은 헤게모니를 이성, 과학, 지식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탄생했습니다. 비합리적 권위를 타파하고 객관적 진리를 사회 운영의 원리로 삼은 모더니즘은 20세기 초중반까지 세상을 지배한 히트 상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정답'이 있다는 확고한 관념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를 구분하고, 진리를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계몽'하고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제국주의의 폭력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낳는 비극으로 귀결되었습니다.
한국의 '압축 성장'은 바로 이 모더니즘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결과였습니다. '하면 된다'는 구호 아래 '젊을 때 공부하고, 열심히 일해 돈 모아 집을 산 뒤, 노년에 편안하게 사는 것'이라는 단 하나의 성공 공식이 사회 전체의 '정답'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 명확한 목표는 우리를 선진국 문턱으로 이끈 강력한 엔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엔진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시스템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정답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고, 이는 결혼과 출산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되었습니다. 결국 노후에 월세를 받으며 편안한 삶을 살겠다는 '정답'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그 정답의 전제 조건인 다음 세대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역설을 낳은 것입니다.
이미 시작된 변화, 그러나 붙잡고 있는 과거
물론 한국 사회 전체가 모더니즘의 화석으로 남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포스트모던적'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BTS와 K팝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는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하이브리드적 특성, 팬들과의 수평적 소통, 획일화되지 않은 세계관 등은 '정답 없음'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가치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문화 영역에서 우리는 이미 '피처폰'을 버리고 최신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회의 다른 영역들이 여전히 낡은 운영 체계에 갇혀 있다는 점입니다. 교육은 여전히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학생들을 서열화하는 데 골몰하고, 부동산은 서울 아파트라는 단일 자산에 대한 광적인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정치는 '내 생각만이 정답'이라는 이분법적 아집에 빠져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얼마 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의정 갈등은 대한민국 교육을 가장 잘 따라온 의사들과 의대생들이 공동체 의식이 아닌 자신의 이익에만 골몰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이에 서울대 의대에서는 부랴부랴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책무에 대한 교육을 그렇지 않아도 빡빡한 의대 커리큘럼에 넣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책임감을 교육으로 주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모더니즘의 산물입니다. 이제 사상 자체를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는 마치 최신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도 전화와 문자라는 피처폰 시절의 기능만 힘겹게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불균형과 충돌이 바로 우리 사회가 겪는 고통의 본질입니다. 변화의 가능성은 이미 우리 안에 있지만,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그 가능성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입니다.
정답을 넘어 '각자의 답'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 전환의 길
이제는 '하나의 정답'이라는 낡은 사상과 결별하고, 포스트모더니즘적 전환을 구체적인 현실의 대안으로 모색해야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든 것이 의미 없다'는 허무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보편적인 정답은 없지만, 각자의 맥락과 상황에 맞는 최적의 '방향들'은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의 전환입니다.
지방 소멸 문제에서 중앙정부가 설계한 획일적인 발전 계획은 모더니즘적 해법입니다. 포스트모던적 해법은 각 지역이 가진 고유한 역사, 문화, 자원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발전 모델을 찾도록 권한과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권한과 자율성의 이면에는 책임도 함께 있습니다. 자율성이 커질수록 운영 실패로 인한 '지자체 파산'도 따라올 것이지만,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이것도 비용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메가시티'가 정답인 것 마냥 회자되고 있지만, 수많은 다양성이 모였을 때 더 크고 풍부한 생태계가 형성되는 것은 우리가 익히 느끼는 바입니다.
인구 문제 역시 '정상 가족'의 출산이라는 단 하나의 모델을 정답으로 삼는 대신, 출산과 육아가 가능한 여러 형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인정하는 태도가 포스트모더니즘적 해법입니다. 국제 결혼, 1인 가구, 비혼 동거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법과 제도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방금 언급한 개별 해결 방법이 정말 효과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답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가진 파괴력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의 출산'이라는 정답을 강요하는 그 자체가 출산과 육아를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출산과 육아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존중할 때 공동체는 오히려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사상은 유행처럼 돌고 돕니다.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언젠가 또 다른 사상에 자리를 내어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가 겪는 문제들은 낡은 운영 체계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남의 사상을 수입해와 우려먹는 단계를 넘어, 한국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사상의 옷을 입고 '정답 없는 사회'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만능열쇠를 찾는 일을 멈추고, 우리 각자의 문에 맞는 열쇠를 각자의 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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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