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의료의 딜레마: 낡은 규제가 만든 새로운 현실
대한민국 의료 체계는 ‘당연지정제’, ‘비영리 의료기관’, 그리고 ‘1인 1개소법’이라는 세 가지 핵심 규제를 기반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흔히 ‘의료 3불 정책’이라 불리는 이 제도들은 의료의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 마련되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그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국 의료의 고질적인 문제들은 이 낡은 규제와 깊이 얽혀 있습니다.
기형적인 당연지정제와 그 그림자
당연지정제는 한국 의료의 가장 특징적인 제도입니다. 모든 의료기관은 국민건강보험(이하 건보) 진료를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이는 국민의 의료 접근성을 보장하고, 환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의료기관이 건보 진료를 통해 받는 수가가 원가에 크게 못 미친다는 점입니다. 제도 도입 초기에는 원가의 55% 수준이었고, 지금도 70%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건보 진료만으로는 의료기관 운영이 불가능해지자, 많은 병원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비급여 진료와 실손보험에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건보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 고가의 미용, 성형, 또는 특화 진료 분야가 발달하게 된 배경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의료기관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의료비 상승의 주요 원인이 되고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가중시키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건보 재정은 늘 부족하고, 의료기관은 수익성 문제로 허덕이며, 국민들은 복잡한 보험료와 진료비에 혼란을 겪는 기형적인 구조가 고착된 것입니다.
미래를 가로막는 ‘1인 1개소법’
의사 한 명이 병원 한 개만 개설하고 운영하도록 제한하는 ‘1인 1개소법’은 언뜻 보면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이는 의사가 돈만 좇아 여러 병원을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며 의료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막고, 이른바 ‘사무장 병원’ 같은 불법 행위를 근절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의료의 형태가 급변하는 지금, 이 규제는 오히려 혁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고령화가 10~15년 앞선 일본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일본에서는 고령 환자의 집을 직접 찾아가 진료하는 방문 진료가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이신칸’ 같은 비즈니스 모델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왕진 의사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환자의 수요에 맞춰 의사를 신속하게 배치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일본은 의사 1명이 개인 의원을 운영하면서도 법인화가 가능하고, 다른 병원 소속의 봉직의로 활동할 수 있어 이런 효율적인 모델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1인 1개소법 때문에 이러한 모델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병원 개설자는 다른 병원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는 봉직의로 일할 수 없습니다. 왕진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환자를 모아 개별 의사에게 연결해줘야 하는데, 이는 ‘환자 유인·알선’이라는 법적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결국 능력 있는 의사가 방문 진료를 체계적으로 제공하기 어렵고, 대부분의 시도는 비용만 소모하다 좌절되기 십상입니다. 이는 단순히 왕진 서비스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국가가 동네 의원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있는 현실에서, 1인 1개소법은 자유로운 경쟁을 막아 의료 혁신을 저해하는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명제
지금까지 한국 의료 정책은 ‘아프면 치료받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명제 아래 의료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삼아왔습니다. 과거에는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하며 아픈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 명제는 유효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국민들의 건강 수준이 향상되고, 생활 환경이 좋아지면서 의료 수요의 양상도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암이나 중증 질환처럼 고도의 치료가 필요한 분야의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평소 내는 공적, 사적 보험료 덕분에 우리는 큰 병원에서 수준 높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현재의 제도가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의료의 접근성, 비용, 그리고 수준은 모두 만족시키기 어려운 목표들입니다. 지금은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그 균열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속도를 늦추고 미래를 대비하려면, 그동안 금과옥조로 여겨왔던 의료 3불 정책을 재검토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국 사회의 정책 고착성이 워낙 커서 변화가 쉽지는 않겠지만, 여러 사건과 사고를 겪은 후에야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의료 제도가 가진 고유한 한계와 시대적 변화를 직시할 때, 우리는 모두에게 더 나은 의료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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