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기운이 여기저기 고개를 내미는 4월 초, 전 세계는 관세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상호관세'라는 개념으로 적게는 10%, 많게는 50% 가까운 관세가 각 나라에 부과될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4월 7일 세계 각국 주식 시장은 블랙먼데이로 불릴 정도로 큰 폭의 하락을 기록하였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관세는 과거의 유물로 치부되었습니다. 자유무역이라는 이름 하에 세계 각국은 관세를 철폐하는 제도를 만들어 왔고, 우리나라도 자유무역협정(FTA)을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과 맺으면서 이 흐름에 참여했습니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자유 무역이 많은 기회로 다가왔었고,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지위를 획득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코로나 이후 바뀐 세계는 단순히 사람들이 덜 만나는 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쉼 없이 오가던 사람과 물자의 흐름이 끊기면서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도 만들지 못하는 일을 빈번히 겪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고령화와 저출산이 진행되면서 버는 돈보다 그동안 벌었던 돈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구조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으며, 세계화를 위해 기축통화인 달러를 천문학적인 액수로 뿌렸던 것이 인플레이션과 달러 패권에 대한 도전,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를 초래했습니다.
덧붙여, 그렇지 않아도 쇠퇴하고 있던 미국 제조업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빈 제조업은 빅테크로 표현되는 서비스 중심 정보통신 기업들이 차지했고, 해당 기업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 들였지만, 정작 미국 내 고용에 대해서는 큰 기여를 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사람을 많이 쓰는 업종이 아닐뿐더러 그나마도 비용이 저렴한 세계 각국에서 노동력을 충당했기 때문입니다.
제조업이 중요한 이유는 중등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출퇴근을 하면서 일을 하면서 정기적인 소득을 확보하고, 남는 돈으로 소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장일은 누구에게나 고되고 부가가치 측면에서 서비스 업보다 우위 확보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꾸준한 소득을 담보할 수 있어서 사회 안정에 중요할 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로도 부의 분배 효과를 서비스업보다 더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서비스 업은 외부 노동력의 유입, 경기침체 뿐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서비스업의 변화 속도가 빨라서 인력의 숙련도를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공장에서 10년 이상 일한 사람들과 호텔이나 병원, 레스토랑에서 10년 이상 꾸준히 일한 사람들 중 누가 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미국은 한 때 중국과 같은 세계의 공장이었습니다. 시기로는 1950년대가 트럼프가 얘기하는 위대한 미국을 의미합니다. 한국전쟁 빼고는 큰 전쟁이 없었고, 냉전이 본격화되기 전이었습니다. 이민자와 인종 간의 갈등도 첨예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장에 출퇴근하면서 자산을 축적해 중산층이 되었고, 집과 차를 사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고 가끔씩 휴가를 즐기는 평온한 삶이 반복되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그 시대를 사셨던 우리나라 어르신들은 '미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좋은 물건들은 미국산이 많았습니다. 저희 집에도 어머님이 혼수로 가지고 오셨던 미제 전기 다리미가 있었고, 90년대까지도 전자제품은 미국산과 일본산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Made in USA'가 찍힌 물건을 의도적으로 구하려고 해도 구하기 쉽지 않은 지금 현실과 비교하면 상전벽해 수준입니다.
미국은 세계의 공장을 독일, 일본, 한국, 중국에 내주고 서비스업, 금융업으로 돌아섰습니다. 해당 산업들은 고용 창출이 크지 않기 때문에 부자들은 많이 생겼지만, 정작 국민들의 일자리는 줄어드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기부나 정부 지원으로 굶는 사람은 없지만, 이를 제외한 나머지, 특히 자기가 사회에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실감을 채우는 데는 실패합니다. 펜타닐을 위시한 수 많은 향정신성 약물의 남용이 이를 대변합니다.
트럼프는 정치적으로 이 지점을 노리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내어준 제조업을 되찾고 중등 교육을 받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출퇴근 시키겠다는 명목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제일 빠른 방법은 미국 공화당의 전통적인 노선인 고립주의입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내수가 가능한 나라입니다. 인구와 자원, 기술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경기침체를 감수하고 모든 교역을 중단시킨 후 미국 내에서 생산과 소비를 하도록 유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경우 세계 초강대국으로서의 패권이 사라집니다. 세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포기하는 순간, 유라시아 대륙 양쪽에서 적대적인 국가가 나타나 대서양과 태평양을 봉쇄할 수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에서 일본과 독일이 그랬고,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내수로도 번영할 수 있는 국가지만, 패권을 놓으면 아메리카 대륙에 갇힌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푸틴과 시진핑과 같은 독재자 하고도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이들이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스탠스를 취할 때는 여지없이 경고를 보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관세가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으로 본 것 같습니다. 관세를 부과하면 상대방 국가도 관세를 부과할 수 있습니다. 당장 중국이 관세보복을 시작했습니다. 트럼프는 바로 더 큰 관세로 대응합니다. 나머지 국가들은 관세를 맞고도 당장 보복을 못하고 있습니다. 협상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 관세가 없다가 관세가 생기니 미국 국민들은 물건을 비싸게 사야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입장에서는 그게 거의 유일한 문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미국은 상품을 수출하는 국가가 아닙니다. 구글이나 AI, 넷플릭 같은 서비스는 수출을 많이 하고 있기에, 여기에서는 관세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상품 무역과는 달리 서비스 무역에는 관세를 매기지 않았습니다. 물건을 모두 다 사서 쓰는 나라가 물건을 파는 나라들에게 관세를 매긴 것입니다. 미국에게 관세 보복을 해 봤자 미국 입장에서는 타격이 크지 않습니다. 되려 교역이 줄어드니 외국으로 풀리는 달러가 줄어들어 달러 강세로 인해 타국의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1400원대를 오고가는 원-달러 환율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강달러는 달러 패권을 지키는 데 유리합니다.
유일하게 문제인 미국내 물가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원자재, 특히 석유값을 낮추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자립국인 미국이 계속 셰일가스를 시추하면서 1년전 배럴당 86달러였던 서부텍사스유 가격을 꾸준히 내리더니, 관세 발표 후에는 14% 가까이 떨어뜨리면서 60달러대로 떨어뜨렸습니다. 미국에서 구하기 힘든 희토류 등 일부 재화는 적극적으로 확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하기 어려운 산업 분야도 일일이 해당 국가에 연락해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군함을 포함한 선박 유지보수가 그 중 하나입니다. 아, 계란 수출도 있네요.
원자재 가격 하락만으로 해결되지 않거나 보복관세로 타격이 심한 일부 산업분야는 어마어마하게 걷힐 관세로 보조금을 지급할 것입니다. 미국의 무역상대국에게는 미국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달러 패권을 지키는 효과를, 국내적으로는 미국의 재정적자를 완화하고 외국 기업의 투자를 거칠게라도 촉진시켜 일자리를 창출합니다.
미국 외 국가는 그 동안 잘 팔던 물건이 관세로 수요가 줄어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보복관세를 해 봤자 더 큰 보복이 돌아올 것이고, 수요 감소로 인해 미국의 무역 상대국들은 경기침체를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은 강달러로 인해 같은 물건을 팔아도 원화 표시 매출은 높아졌습니다. 관세를 감안해도 나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업들은 생산지 다변화를 공식적으로 천명할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이 강세인 경우 외국 공장을 짓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봅니다. 생산 물량을 돌려버리면 노조의 지배력이 약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트럼프가 대 놓고 미국에 공장을 안 지으면 관세를 때리겠다고 하니 미국 수출이 많은 기업들은 생산 시설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설립할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트럼프는 사업 하듯이 정부 정책을 운용합니다. 투명성, 공정성, 일관성이라는 정책 수립의 원칙은 그에게는 거추장스럽고 위선적인 설명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당장 캐나다와 멕시코가 추가 관세에서 빠진 것만 봐도 협상을 통해 정책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음을 반증합니다. 앵커링, 양보도출, 감정전략, BATNA, ZOPA 등 협상에서 쓰는 수많은 방법들을 트럼프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협상론으로 간다면 우리도 동일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가장 효율적인 협상은 협상 당사자들이 내놓는 카드들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서로 챙겨서 전체적인 효용을 증대시키는 것입니다. 자유무역과 세계화의 종말이라는 큰 흐름 속에 관세전쟁이라는 난관을 잘 해쳐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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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