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고실험의 시작
예전에 친구들과 농담처럼 나눈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 흑석동에서 평생 한 발자국도 못 나오는 대신 1조원이 생기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가정적 상황이었습니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은 강남과 가까운 부촌이지만, 개발이 필요하고, 진행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것을 누가 하겠느냐"는 반응이 나올 줄 알았지만, 막상 서로의 아이디어를 내면서 흥미로운 논의가 전개되었습니다.
제약 조건의 창의적 해결
친구들과 나눈 아이디어들을 정리해보면:
인적 교류의 문제: 흑석동에서 못 나가니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느냐는 문제는 '충분한 돈으로 그들을 초청하는 것'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봤습니다.
문화생활의 한계: 강남의 새로운 맛집이 있다면 배달을 시키거나, 정말 맛있으면 돈을 주어 흑석동에 분점을 차리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나 공연도 한국에서 제일 먼저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공간적 제약의 극복: 이동의 자유가 아쉽다면 지하와 우주까지 위아래로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는 건물을 지어 수직적 공간을 활용하는 방법도 고려했습니다.
의료 서비스: 몸이 아파도 최고의 의료진을 부를 수 있을 것이므로 건강 관리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돈 1조원과 흑석동 평생 거주를 바로 결론내리기는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현실적 함의: 지역발전과 인구 집중
최근 이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 것은 인구감소와 수도권 집중 현실에서, 지역발전을 '일자리'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지방에서 일했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서울로 가는 사람들의 동기는 단순히 경제적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 "큰 돈을 벌려면 서울을 가야 한다"는 인식과 "재미있게 사는 것도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들은 일자리의 수준을 낮춰서라도 서울을 선택했습니다.
최근 의대증원 사태로 인한 전공의 사직 사례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쏟아져 나온 전공의들로 인해 수도권 봉직의의 급여가 낮아지면서 지방 생활을 감수하는 의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의사들이 낮아진 월급을 감수하고 서울 생활을 하거나 아예 직장을 구하지 않고 쉬는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소득이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동의 자유와 효용의 상관관계
흑석동 딜레마는 결국 이동의 자유와 소득으로 대표되는 효용의 상관관계를 드러내는 사례일 수 있습니다. 이를 다양한 조건으로 확장해볼 수 있습니다:
- 흑석동 제약 + 1조원 vs 서울 제약 + 100억원
- 유라시아 제약 + 10억원 vs 전 세계 자유 + 1억원
- 같은 조건에서 1년에 한 번 여행 가능 vs 10년에 한 번 여행 가능
이론적 접근: 이동과 삶의 여건
이 관점에서 보면, 일자리로 인한 소득 문제를 넘어서 삶의 여건과 이동의 필요성을 대비해볼 수 있습니다. 게임이론적 접근과 유사하게, 이동으로 삶의 여건이 좋아진다면 당연히 이동할 것이고, 반대로 이동이 삶의 여건 개선을 담보하지 않는다면 굳이 터전을 옮기지 않을 것입니다.
농업 사회에서 태어난 곳에서 죽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생산수단인 땅을 버리고 갈 수도 없을 뿐더러,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도 그 동안의 삶과 같다는 보장을 할 수 없었습니다. 농업에서 공업으로 산업구조가 바뀌고서야 농촌을 등지고 서울살이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나 서울이나 광역시 등 큰 도시로 몰리던 것이 한국 근대사의 한 축이었습니다.
현재는 생산공장이 지방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도 수도권으로 몰리는 현상을 단순히 일자리와 소득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의외로 다른 측면에서 문제가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수학적 모델링의 가능성
이 흑석동 딜레마가 큰 의미가 있는 주제는 아닐 수 있지만, 어디에서 오랫동안 산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거주지 선택의 문제를 효용함수와 제약조건으로 모델링한다면, 다음과 같은 변수들을 고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경제적 효용(소득, 자산)
- 이동의 자유도(공간적 제약)
- 사회적 관계(인적 네트워크)
- 문화적 접근성(여가, 교육, 의료)
- 시간적 제약(나이, 생애주기)
이러한 다차원적 접근을 통해 현대 사회의 인구 이동과 지역 발전 정책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고, 가닥을 잘못 잡았을 수도 있지만, 한번쯤은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일 것 같아서 글을 써봅니다.
'사회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리학의 그림자, '정답 사회'를 넘어 (1) | 2025.07.09 |
---|---|
한의학과 AI: 표준화의 패러독스와 새로운 가능성 (1) | 2025.07.02 |
AI와 글쓰기: 건축가에서 조각가로 (0) | 2025.06.18 |
난독사회 - 얇아지는 책, 옅어지는 생각 (3) | 2025.06.14 |
MBTI에서 에겐·테토까지, 그리고 사주팔자: 성격 분류의 새로운 흐름 (0) | 2025.06.01 |
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