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의학 표준화의 딜레마
한의학 연구에서 '표준화'는 오랫동안 뜨거운 화두였습니다. 같은 환자를 진료해도 한의사마다 다른 진단명을 내리는 것이 일상이었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고 여겨지는 사상체질조차 전문가 간 진단 일치율이 70%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진단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정밀도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한의학계에 양가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편으로는 연구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근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확한 진단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현실에서는 KCD(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 기준으로 진단 및 보험청구를 하고, 한의사 각자가 활용하는 이론 체계에 근거해 치료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표준화 미비가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은 한약 처방입니다. 심평원의 삭감 정책이 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서양의학이 단일 성분 위주의 치료법을 추구하는 것과 달리, 한약은 다양한 약재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약 처방의 다양성은 늘 표준화의 걸림돌로 여겨져 왔습니다.
AI 시대의 도래와 의료계 변화
그런데 AI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표준화된 것들이 오히려 AI에 의해 대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료 분야에서 AI 활용은 먼 미래의 일로 여겨졌지만, 이미 영상진단 AI 서비스가 상용화되었습니다. 영상진단이 이 정도라면, 데이터 양이 상대적으로 적은 생화학 검사나 심전도 판독에서 AI가 인간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최근 AI는 의사와 유사한 진단 수준을 넘어서서, 인간보다 월등한 진단 정확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검사 없이 바로 최적의 검사를 도출할 수 있다는 보고도 나오고 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AI한테 물어보는 것을 보고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 고령화 상황에서 검사비와 의사 의존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나라든 의료 AI의 도입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은 AI 회사들이 "완전하지 않다"며 선을 긋고 있지만, 자율주행차의 사례를 보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2010년대 중반 각종 문제점이 논의되면서 가능성이 의심받던 자율주행차가 10년도 되지 않아 무인으로 도로를 달리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수술하는 의사만 있는 무인 인공지능 병원의 등장도 먼 미래의 일은 아닙니다.
AI 대체 가능성과 의료 전문직
특정 직업의 AI 대체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한국은행은 'AI 노출도'와 'AI 보완도'를 제시했습니다. AI 노출도는 해당 직업이 AI로 대체될 가능성을, AI 보완도는 사회제도 등으로 인해 AI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정도를 평가합니다. 예를 들어 벌목공은 AI 대체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사무 보조원들은 AI 대체 가능성이 높습니다. 코로나 시기 높은 몸값을 자랑했던 개발자들이 대거 해고되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의사는 AI 노출도는 높지만 보완도도 높아 쉽게 직업을 잃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고난도 수술을 AI가 당장 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공별로 편차는 클 것입니다. 수술 전 시행되는 수많은 검사와 그 결과 해석에는 의사뿐만 아니라 임상병리사, 간호사 등 많은 인력이 참여합니다.
혈액 채취나 영상 촬영 행위 자체는 AI가 대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를 판독하고 해석하는 영역에서는 의사의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 하루 100장의 영상을 겨우 보던 의사가 AI 보조로 500장을 볼 수 있다면, 의사 5명의 자리가 사라지는 셈입니다. 신뢰할 만한 AI 진단 도구가 등장하면 바로 현실이 될 이야기입니다.
한의학의 특수한 위치
한의학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AI 대체 가능성이 낮게 평가되었습니다. 침, 뜸, 부항, 추나, 약침 등 치료 수단이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약이 여러 약재의 복합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어 AI가 대체하기 어렵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표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대체를 어렵게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지속적인 표준화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보면, 한의학의 특성 자체가 기존 통계학적·생화학적 방법론으로는 표준화하기 어려운 구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의학의 고유한 특성을 버려서라도 표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논의까지 진행되던 사이에 AI 시대가 도래했고, 표준화의 어려움이 되려 AI 대체를 막는 역설적 상황이 된 것입니다.
AI를 활용한 한의학 표준화의 새로운 가능성
그렇다고 한의학 표준화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AI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지금, AI를 활용한 한의약 표준화라는 새로운 접근이 가능해졌습니다.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고 자연과의 연결성을 중시하는 한의학을 이해하려면, AI가 아니고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한의학은 일대일의 단순한 관계가 아닌 다대다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이는 AI가 가장 잘하는 영역 중 하나입니다. 한약 분야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한 네트워크 약리학에 관심이 높아지고, 수많은 장내세균과 한약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것도 AI가 있어야 가능한 연구들입니다.
바둑 AI에서 보는 미래 한의학의 모습
인공지능이 바둑에서 인간을 이긴 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도 바둑은 여전히 사람이 두지만, 하나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바둑 대국 화면에 AI 형세 판단이 실시간으로 표시되는 것입니다. 기사들이 수를 둘 때마다 유불리 변화가 그래프로 나타나고, 승부수가 나오면 승률이 한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변이 없는 한 거의 그 결과대로 바둑이 마무리됩니다.
바둑의 경우의 수는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다고 할 정도로 복잡하지만, AI는 어느 쪽이 얼마나 유리한지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둑 프로기사들도 이제 AI의 도움을 받아 전략을 연구합니다.
AI가 결합된 표준화된 한의학도 이런 모습이 될 것 같습니다. 환자의 상태를 모두 입력하면 여러 치료법을 도출해주고, 한의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치료법을 조합하면서 환자에게 최적의 결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고 시행합니다.
다만 AI 바둑이 형세 판단은 정확히 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것처럼, 한의학 AI도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기전 연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별도의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한의학 연구도 이러한 방향에 맞춰 진행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위기이자 기회인 AI 시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지만 AI는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한의학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의학이 현대과학으로 설명되지 못했던 것은 한의학 자체의 한계도 있겠지만, 과학적 방법론의 미비도 상당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도구의 성능만큼 우리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제 새로운 도구가 나타났으니, 다시 한번 '오래된 미래'인 한의학을 살펴볼 때가 되었습니다. AI라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한의학의 진정한 가치와 가능성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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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