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한의학연구원에서 연구에 매진했었다. 공중보건의로 시작한 연구원 생활이 계약직 연구원으로 3년 정도 더 있다가 나올 줄은 시작할 때는 몰랐었고, 그 시간 동안 30여 편의 논문과 학회 발표, 가끔씩 연구결과의 언론 보도 등을 겪었었다.
시간이 흘러 개원가에서 진료를 한지 5년이 다 되었다. 연구원에서 나와 진료를 할 때는 최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진료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달라진 점은 있다. 바로 연구와 의료의 우선 관계이다.
연구를 할 때는 모든 의료행위가 근거가 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이 하는 행위는 요식행위라고 생각했고 장기적으로는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반대다. 의료행위는 위험을 동반한다. 어떤 시술을 할 때 위험성이 매우 낮다고 해도 그걸 책임지는 의료인의 입장에서는 가벼이 넘길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환자들은 논문에 시술방법의 근거 유무에 관심이 없다. 나를 치료해주는 의사가 어떻게든 내 몸의 이상을 고쳐주길 바랄 뿐이다.
연구는 이런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의료인들에게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 또한 의도치 않게 마주하는 의료사고에 대한 방어수단은 될 수 있다. 그러나 당장 환자를 좋아지게 해야 하는 의무에서 해방 시켜줄 수는 없다.
대부분의 연구결과들이 임상현장에 바로 적용될 수 없다. 제한된 조건에서만 통계적으로 효과적인 시술은 큰 의미가 없다. 신약개발이 대부분 대규모 3상에서 엎어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사람'에게 잘 듣는 치료법은 많지 않다. '높은 근거 수준'은 대규모로 의료정책을 짜야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할 수 있지만 환자 개개인을 볼 때는 어디까지나 참고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는 동안에도 의미가 있는 한의학연구원의 연구결과물들이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1. 한약기원사전 링크
한의학연구원 최고야 박사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약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놓았다. 약물 처방을 할 때 어떤 약재를 선별해야 하는지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다양한 기원을 인정하는 약재의 경우 기원사전을 찾아서 어떤 약재가 적합한지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국 약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약재의 효능을 찾는 데 용이하다. 다른 나라의 약전과 달리 중국 약전은 약재의 기미, 귀경, 효능, 주치를 정리해놨다. 온병 개념까지 포괄해서 정리가 되어 있어 처방을 선정하거나 가감을 할 때 많은 참고가 된다.
2. 한의학고전DB 링크
동의보감을 포함한 우리나라에서 나온 의서를 중심으로 원문과 번역본을 제공하는 사이트이다. 경악전서 등 주요 서적에 대해서도 번역을 제공한다.
이 사이트의 가치는 기존 의서에서 질환에 따라 어떤 처방을 썼는 지, 또는 처방에 따른 가감을 어떻게 했는지 전반적으로 훑어볼 수 있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보중익기탕을 검색하면 동의보감뿐만 아니라 여러 의가들이 저술한 의서 내에서 보중익기탕의 사용례와 가감례 등을 따로 의서별로 찾을 필요 없이 한 번에 검색이 가능한 장점이 있다.
필자는 약재 하나하나를 넣어서 처방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다빈도 처방을 쓰거나 약재를 조합하는 사례를 찾을 때도 이 사이트를 이용하는 편이다.
3. 오아시스 링크
한의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전통의학정보포털이다. 주로 쓰는 것은 논문 검색과 한약처방 항목이다.
회원 등급에 따라 열람 가능 내용이 달라지긴 하지만 논문 원문을 볼 수 있다는 점은 좋다. 그리고 한약처방의 경우 처방의 시대별 구성 변화 효능 주치가 임상에서 참고할 만하고 각종 이화학, 전임상, 독성 정보나 임상연구를 정리해놓은 것도 처방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4. 그 외
한의학연구원에서 나오는 논문은 데이터 수집량이나 연구의 질 차원에서 좋은 편이다. 한의계에서 가장 많은 연구비를 운영하는 기관이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연구원의 위상이나 규모를 생각하면 사실 한의원에 바로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임상연구 결과가 많이 나오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다. 기술 개발을 통해 보험 청구가 되는 검사기계나 치료기계를 개발하거나 적응증이 있는 한약제제를 만들고 보험에 진입시키는 것, 난치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전통이라는 이름이 붙인 분야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기술을 가진 사람이 중요하고 그 사람이 대부분 혼자서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대문과 같이 큰 건물을 짓는 것도 대목장 한명이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설계, 감리, 자재, 시공을 다 한다고 보면 된다. 한의약도 한의사 혼자서 침도 놓고 약도 짓고 추나도 한다. 기계가 많이 필요 없으니 투입 비용이 많지 않지만 반대로 확장성도 떨어진다.
현대는 분업을 통해 확장을 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이다. 분업을 할 수 있을 만큼 크기를 키워야 하고 그러려면 정형화된 진단과 치료기기, 약물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과학적인 연구성과는 당연히 따라올 것이다. 이는 일개 대학 연구실이나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제도적인 뒷받침도 중요하겠지만 연구단계에서는 먼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게 한의학연구원에서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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