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의 항염증 효과, Nature가 밝힌 구체적인 신경 경로 한의학에서 임상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고 과학적으로 활발히 연구된 치료법은 단연 침입니다. 특히 발열, 부종, 통증을 동반하는 염증 반응에 대한 침의 개선 효과는 수많은 임상가들이 경험하는 현상이지만, 그 구체적인 작용 기전은 오랫동안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이러한 상황에서 저명한 학술지 Nature에 실린 연구(https://doi.org/10.1038/s41586-021-04001-4)는 전침(전기침)이 어떤 경로를 통해 항염증 효과를 내는지 동물실험으로 명확히 밝혀냈습니다. 이 연구는 단순히 '효과가 있다'는 것을 넘어, '어떤 신경세포가', '어느 부위에서', '어떤 자극에 반응하여' 효과를 나타내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우리의 임상적..

재정위기와 분노가 소환한 부유세 프랑스의 재정적자가 심화되면서 긴축 재정을 시행하게 되자 총리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사임하고 프랑스 각지에서 시위가 격해지는 등 사회적 대립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생각하는 방법은 연금 수령 연령을 미루고 공휴일을 줄이는 등 공공지출을 줄이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에 반대하여, 과거 부유세 등 소위 '부자 세금'을 줄여서 세수가 감소했기 때문에 지금의 문제가 생겼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들은 초고소득 부자들을 상대로 다시 세금을 걷는 것이 단순히 세수를 확보하는 것을 넘어, 극심한 불평등이 야기하는 사회적 갈등 비용을 줄이고 조세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프랑스 정도 되는 국가가 재정위기를 논할 정도면 사실 하루이..

'근대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도 '징세청부업자'로서 가혹하게 세금을 착취했던 과거를 덮어주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부터 천국에 가기 어려운 직업으로 언급될 만큼,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사적 이익을 위해 국민을 압박했던 '세리(稅吏)'는 역사적으로 증오와 개혁의 첫 번째 대상이었습니다.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통해 유럽의 근대 국가들은 세금 징수를 사적 이익이 개입할 수 없는 국가 시스템 안으로 완전히 편입시켰습니다. 징수 과정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할 유인을 원천적으로 제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이 악명 높은 세리의 모습이 법 조항 속에서 여전히 발견되고 있습니다. '성과급'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세리의..

정답 사회의 성공, 그리고 명백한 한계 지방 소멸과 인구 감소라는 사회 변화는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정부가 수백조 원을 투입하고 전담 부서까지 만들며 이 문제와 씨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백약이 무효라는 냉소 섞인 공감대만 남았습니다. 이제는 '다른 나라도 인구가 준다더라', '일본 빈집 문제에 비하면 우리는 낫다'는 식으로 체념 섞인 적응을 모색하는 분위기마저 감지됩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수단이 모두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문제의 근저에 깔린 우리 사회의 운영 체계, 즉 '사상'을 점검해야 합니다. 제 진단은 한국 사회가 사상의 발전 단계에서 아직 모더니즘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은 종교와 왕권이라..

질병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했고, 인간의 변화는 곧 질병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기후변화, 기술발전, 사회체제의 변화는 인류의 삶을 바꾸었고, 질병의 양상 또한 그 흐름을 같이했습니다. 특히 최근 100년간의 변화는 이전 수천 년을 압도할 만큼 거대했으며, 질병의 형태와 이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 역시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현대 보건의료의 패러다임을 '확정적 치료(Definitive Treatment)'와 '확률적 건강관리(Probabilistic Health Management)'라는 두 가지 분석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확정적 치료가 원인이 명확한 질병을 진단하고 표준화된 방법으로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확률적 건강관리는 명..

정부출연연구원(이하 '정출연')의 숙원이던 PBS(Project-Based System)가 폐지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정출연이 정부의 돈을 받아 운영되는 사실상 '정부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각 연구원들이 외부 과제를 수주해서 스스로의 연구비를 충당해야 하는 PBS는 1996년부터 도입되었으니, 한 세대인 30년 가까이 되어서야 폐지가 되는 것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PBS가 폐지되자 이에 대한 환영의 글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이 과제 수주와 행정에만 몰두하게 만들고 정출연의 고유한 역할을 막은 PBS가 없어졌으니 좋다는 내용이고, PBS를 대체하는 새로운 평가기준의 필요성도 언급하는 내용들입니다. 저는 PBS가 없어지고 나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왜 PBS라는..

예약 필수 식당에서의 당황스러운 경험 점심 쯤 식사할 곳을 알아보기 위해 네이버 맵을 켰습니다. 주위에는 3만원대에 좋은 등급의 참치와 함께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비즈니스 호텔 지하에 있어서 한번씩 지나던 곳인데, 그곳 지하에 있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여튼 가봅니다. 1층 계단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 A형 입간판이 등장합니다. '저희 식당에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식사를 하실 수 없습니다. 30분 전에는 예약을 해주셔야 식사가 가능합니다'라고 건물 벽면 간판보다 더 잘 보이게 표시를 해놨습니다.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지하로 내려갑니다. 입구에 들어서니 직원들도 바쁘고, 룸으로 이뤄진 식당인데도 수많은 손님들의 대화 소리가 웅성웅성 전해져 들립니다. 홀 직원의 ..

유목민적 유연성의 시대'시스템이 엉성하다', '변화가 급격하다'는 평가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였습니다. 다른 선진국들이 견고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동안, 한국은 마치 유목민처럼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정권 교체 시마다, 때로는 한 정권 내에서조차 조세·교육·복지·국방 등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정책들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었습니다. 국민들은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정부가 뭔가 일하고 있다'는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이기도 했으며, 이는 분명 한국 사회만의 뛰어난 적응력이자 유연성으로 작용하였습니다.하지만 이 유연성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한 정권에서 추진한 정책이 다음 정권에서 완전히 폐기되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과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