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목민적 유연성의 시대'시스템이 엉성하다', '변화가 급격하다'는 평가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였습니다. 다른 선진국들이 견고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동안, 한국은 마치 유목민처럼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정권 교체 시마다, 때로는 한 정권 내에서조차 조세·교육·복지·국방 등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정책들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었습니다. 국민들은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정부가 뭔가 일하고 있다'는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이기도 했으며, 이는 분명 한국 사회만의 뛰어난 적응력이자 유연성으로 작용하였습니다.하지만 이 유연성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한 정권에서 추진한 정책이 다음 정권에서 완전히 폐기되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과 불..

한국 의료의 딜레마: 낡은 규제가 만든 새로운 현실대한민국 의료 체계는 ‘당연지정제’, ‘비영리 의료기관’, 그리고 ‘1인 1개소법’이라는 세 가지 핵심 규제를 기반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흔히 ‘의료 3불 정책’이라 불리는 이 제도들은 의료의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 마련되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그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국 의료의 고질적인 문제들은 이 낡은 규제와 깊이 얽혀 있습니다. 기형적인 당연지정제와 그 그림자당연지정제는 한국 의료의 가장 특징적인 제도입니다. 모든 의료기관은 국민건강보험(이하 건보) 진료를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이는 국민의 의료 접근성을 보장하고, 환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의료기관이 건보 진료를 통해 받는 수가가 원가에..

당연지정제, 이제는 논의할 때입니다당연지정제는 국민 대부분에게 생소한 단어입니다. 의료기관을 운영하거나 정책에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니라면 처음 듣는 제도일 수도 있습니다. 의료계 종사자조차도 '그런 제도가 있다'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이 제도가 보건의료 체계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깊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하지만 당연지정제는 한국 건강보험의 핵심 구조이며, 현재 의료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제도입니다.당연지정제란 무엇인가?당연지정제는 모든 병원과 의원, 약국이 국민건강보험 진료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제도입니다. 덕분에 국민 누구나 전국 어디서든 건강보험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한국은 의료 접근성과 비용 측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우수한 의료체계..

성수동에 다녀왔습니다. 여전히 젊은 친구들이 모이고, 감각적인 가게들이 자신의 색깔을 내는 곳이었습니다. 예전에 자주 가던 신기한 물건 많이 가져다 놨던 문구점은 이제 건물 전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는 같은 노트인데도 국산 제품이 일제보다 비싸게 팔리는 저로서는 낯선 장면도 목격했습니다.이번 방문은 생맥주 팝업 스토어 때문이었는데, 앉는 자리는 없고 서서 마시는 구조였습니다. 인당 세 잔으로 제한되어 있어 금방 마신 뒤, 위스키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에서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흥미로웠던 건 시간대였습니다.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거리의 불이 하나둘 꺼지고, 대부분의 가게가 이미 영업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지금이 가장 북적였을 시간이었고, ‘젊음의 거리’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십신과 전통적 길흉 개념의 이해사주명리학을 공부하시는 분들께서는 길신(吉神)과 흉신(凶神)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일간(日干)을 중심으로 다른 오행을 음양으로 구분하여 사회적인 관계를 규정한 것을 십성(十星) 또는 십신(十神)이라고 부릅니다. 십신은 부모, 형제, 배우자, 자식과 같은 가족관계를 정의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를 살아가는 수단과 방식을 규정하기도 합니다. 흔히 고위 공직에 순조롭게 오르는 사람에게 '관성(官星)'이 잘 갖춰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십신은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비견(比肩): 자신의 동료나 협력자겁재(劫財): 재물을 급하게 취하려는 행위나 투기심. 경쟁자.식신(食神):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생산수단상관(傷官): 특수하고 창의적인 생산수단이면..

들어가며: 하나인 줄 알았던 '연구'연구원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 저는 '의학연구'가 단일한 하나의 흐름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논문을 찾고, 동물실험을 하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데이터를 얻는 것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여겼습니다. 국책연구원에서 6년간 사람 대상 연구를 하면서, 동물실험은 전임상, 사람 대상 연구는 임상연구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임상을 9년간 하고 나서 기초 연구를 하게 된 지금, 이 둘 사이의 간격이 상당히 크고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네트워크 약리학을 공부하며 기초연구의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동안 주로 임상연구에 몰두했던 경험과 비교해보니 흥미로운 차이점들이 보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차이점들을 살펴보고, 두 분야가 어떻게 서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잘파세대와 소비 패턴의 변화얼마전 국립중앙박물관에 갔습니다. 어릴 때 조선총독부 건물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을 기억하던 세대로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볼 때마다 많은 추억이 떠오릅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갔는데, 일본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유물 소개를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일본어로 무엇인가 잘못된 내용을 따지시던 할아버지가 기억이 납니다. 일일이 옆에 있던 관광객들에게도 유물 소개를 하시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그러다가 이촌으로 옮기고 나서 한번씩 그 주위를 갈 때가 있으면 방문을 합니다. 특히 반가사유상이 있는 '사유의 방'은 한번씩 들러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정리하는 목적으로 가기도 합니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지만 주중에는 공간이 넓직해서 조금씩 쉬면서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습..

조선은 끝났지만, 성리학은 끝나지 않았다역사책에서나 보던 성리학 사회의 모습을 현재 한국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기론(理氣論)과 격물치지(格物致知)로 대표되는 성리학은 500년간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그 수명을 다한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유산은 여전히 우리 삶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가족의 가치, 공동체 의식, 교육을 중시하는 문화 등 우리가 아름답게 여기는 많은 가치들이 성리학과 부합합니다. 그러나 성리학을 숭상하던 조선왕조가 식민지배라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듯이, 성리학의 부작용 또한 여전히 한국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정답 사회'의 기원: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여러 부작용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정답'을 요구하는 문화입니다.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