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의료체계로 영국의 NHS(the National Health Service)가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표방했던 복지 국가 영국의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제도이자 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보험과 비교되고, 실제로도 정책시행에서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 등 여러 개념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하고 있다.
최근 NHS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영국 이코노미스트(Economist)지에 따르면 NHS 서비스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와 일반의(GP)의 만족도가 최근 30년간 가장 낮은 상태라고 한다. 2010년대에 60%의 만족도를 보이다가 2021년도에는 30%로 곤두박질친 것이다.
간호사들은 임금인상을 주장하며 파업을 벌이기도 했고, 2022년 11월에는 530만 명의 영국인들이 의사를 보기 위해 2주 이상 기다렸다고 한다. 12월에는 5만여 명의 환자들이 응급실에서 입원까지 12시간 이상 걸리기도 했고, 코로나 이후 병원 대기자 명단이 700만 명까지 상승했다는 보도도 있다.
영국 특유의 의료체계인 NHS는 이전부터도 긴 대기시간,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넘기기가 문제가 되었으나 이처럼 문제가 커진 것은 드문 일이다. 가장 큰 원인은 브렉시트(Brexit)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감소한 것이다. NHS의 의사 10명 중 4명의 외국인이며, 간호사는 23%, 진료보조인력은 18%가 외국인이다. 브렉시트는 이민을 통제하면서 불법이민자를 막는 효과가 있었으나, 자유로운 인력의 이동을 막은 만큼 외국인 노동자의 수급에도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로 의료수요는 증가하는 데, 인력수급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영국정부는 부랴부랴 그동안 자리를 채웠던 유럽의 의료인력 대신 인도나 필리핀에서 인력을 수급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재정은 80조 정도이며, 이 중 70조를 국민들에게 걷고, 10조를 정부에게서 받는다. 지출은 2021년 기준 78조로 적자와 흑자를 반복하면서 돈을 맞추는 형태이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최근 5년간 건강보험료 연평균 상승률은 6.77%이고, 지출 증가율은 6.28%이니 현재까지는 버틸만한 상태다.
문제는 앞으로 10년이다. 인구구조를 보면 지금은 65세 이상이 800만 정도고, 20세부터 65세 미만이 3300만이다. 노인과 대다수의 경제활동 인구의 비율이 1:4이다. 10년 뒤에는 65세 이상이 1500만, 20세부터 65세 미만이 3000만이 된다. 비율이 1:2로 바뀌는 것이다.
10년 내로 지금 30대들은 건강보험료가 2배 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월급이 300만 원이면 지금은 월 20만 원 이내(사용자와 고용자가 절반씩 부담)의 보험료가 나왔는 데, 10년 뒤에는 50만 원 가까이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어 자기가 낸 보험료만큼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
80조 예산으로 800만 노인을 책임지고 있었는 데, 노인이 1500만으로 2배 증가하면 160조 가까이 써야 하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건강보험 예산의 20%까지 국가가 책임지도록 하고 있으나 그동안 한 번도 이를 채운적이 없다. 안 채워도 돌아가니 다른 예산으로 돌린 것이다. 10년 뒤에는 국가가 20%가 아니라 100%를 책임져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 온다.
전 국민이 하나씩 가지고 있다시피한 실손보험은 12조 정도고, 비급여가 17조 규모다. 보험회사들이 4세대 실손보험을 출시하면서 130%에 이르던 손해율을 50%로 낮췄다. 인구가 줄어드니 보험 가입자도 적어지고, 그만큼 실손보험이 보장할 수 있는 영역은 줄어든다. 결과적으로 정부 예산이나 실손보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건강보험료 지출증가가 발생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1. 정부의 의사수 증원 정책
지금도 40%의 의사들은 건강보험 진료를 보지 않고 피부, 미용 등 비급여진료를 보고 있다. 건강보험 수가가 낮기 때문이다. 수가를 높여주면 의사들이 건강보험 진료를 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부의 선택지는 아니다. 통상적인 진료비의 70% 수준의 저수가로 책정해 놓고 국민건강을 책임진다고 주장하는 것이 정부다. 시장가에 근접하게 정부가 건강보험을 운영하면 민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 국민들은 저렴하니까 국가 보험을 이용하는 것이다. 정부가 운용하는 건강보험이 비싸지면 굳이 정부의 비효율을 감당할 이유가 없다.
이 때문에 정부는 OECD 평균에 비해 의사수가 부족하다는 것을 앞세워서 증원을 추진하고 있다. 경쟁만이 저수가에 뛰어들 의사를 많이 만들 수 있다는 의도에서다. 영국 같은 경우 의사들이 저수가를 피해 호주 등 영연방 국가로 갈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의사들이 외국에서 일하기 쉽지 않고, 국민들도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먼저 추진할 것이다.
2. 건강보험 재정의 긴축 운영과 의료 사보험 시장의 확대
건강보험의 지출은 현재 구조에서는 더 늘릴 수 없다. 가만히 있어도 지출이 늘기 때문이다. 정부 세금을 넣게 되면 생명에 치명적인 질환에만 돈을 쓰고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판단되는 질환에는 강도 높은 삭감에 돌입할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의사 만나기 힘들고, 병원은 쓰러져야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남의 일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의료기술이나 국민건강보험에서 보장되지 않는 의료서비스들은 비급여로 제공될 가능성이 높다. 좋은 의료를 받고 싶은 사람들은 비급여로 책정되어 있는 여러 의료서비스를 보장해 주는 사보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이다. 의료 민영화까지는 아니어도 개인 선호에 따라 보유했던 보험회사 의료보장상품이 필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3. 의료 인력 수입 시도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병원에서 외국인 의료진을 보기 쉽지 않다. 의사나 간호사 면허가 개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의료는 전형적인 노동집약산업이다. 약값이나 수술장비의 가격도 문제가 되지만 상시 고용해야 하는 인력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부담이다. NHS의 위기의 원인이기도 하다.
인구 감소로 의료계열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적어지면 당연히 급여가 상승하고 의료비 상승을 야기한다. 시장에서 결정되는 의료비 상승을 막을 방법은 없으며, 이에 의료 인력을 외국인에게 개방하려는 시도를 할 가능성이 높다. 아직까지는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라 거부감이 들 수 있지만 영국의 사례를 보면 그렇게 먼 미래의 일 같지는 않다.
4. 전문의약품의 일반의약품 전환 증가
우리나라에서는 의사 처방이 있어야 복약이 가능한 전문의약품 중 꽤 많은 수가 미국에서는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거나 심지어는 아마존에서 온라인으로도 구매가 가능하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의사에게 진료를 봐야 처방받을 수 있는 약을 많이 설정해 놓았다. 모든 약물은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의사에게 진찰료를 주고 한번 더 판단하게 하는 것이 지금의 구조인데, 건강보험재정을 긴축하게 되면 부작용이 심각하지 않은 약에 대해서 일반의약품으로 풀어줄 가능성이 크다. 바꾸어 말하면 약국의 이용비율이 지금보다 늘어난다.
의약분업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동네 약국에서 어지간한 질병에 대해 약사가 바로 맞춰서 판매를 했었다. 지금은 병원에서도 처방이 쉽지 않은 항생제들도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건강보험이 축소되면 사람들이 알아서 약을 사 먹고 버티는 일이 흔해진다. 영국에서 의사를 만나기 어렵게 되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변화 외에도 질병 예방 정책의 강화, 의료수가 상승폭 제한, 건강보험 지방자치단체 일부 이관 등 다양한 정책이 시도될 것이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범위가 줄어든다고 의료수요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채우려는 보험회사나 제약사의 상품이 증가할 것이고, 의료의 빈틈을 채우려는 스타트업들도 늘어날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미 일본이 겪은 경험과 해결책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것 같다. 일본은 초고령사회를 일찍 맞았고, 의료비가 감당이 안 되면서 일상생활이 가능하면 집에서 의료인력이 방문해서 치료하는 재가+방문진료가 일상화되어 있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인정한 요양보호사만 100만 명이 넘는 것을 보면 재가방문진료의 보조인력을 미리 준비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일본의 해결책만 쓰기에는 우리나라의 초고령사회 진입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데 있다. 저출산쇼크로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하는 것처럼, 고령화쇼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대책을 가릴 단계가 아니라는 불안감도 든다.
모든 보험은 비용을 낼 사람이 많고 받을 사람이 적어야 유지된다. 국민건강보험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비용을 낼 사람은 적어지고 받을 사람은 많아진다. 정부 입장에서는 건강보험지출을 줄이기 위해 그전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일들을 강도 높게 추진할 것이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없고, 변화는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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