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일본을 갔던 것은 2007년이었습니다. JR패스라는, 기간을 정해 놓고 자유롭게 기차를 탈 수 있는 표를 가지고 부산으로 간 다음 후쿠오카로 배를 타고 들어가서 오사카-도쿄-오사카-교토-나가사키-후쿠오카까지 8일 동안 여행하는 일정이었습니다.
그때의 일본은 별천지였습니다. 세상을 알아가는 나이인 20대의 호기심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좁은 KTX 밖에 없던 시절에 넓고 편안하며 진동도 없는 신칸센을 탔던 것부터,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시부야역의 깨끗한 공중화장실과, 맛있는 음식과 친절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줄을 새치기하는 사람도 보기 힘들었고, 길에 놓인 물건이라도 자기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가전양판점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최신 제품들이 즐비했고, 백화점 지하에서 파는 음식들은 포장그릇에 담겨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음식점에서 바로 만든 음식보다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일본을 갔다오고 나면 우리나라가 무엇인가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이 들어서 아쉬워했고, 시간 내서 일본을 다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후 2015년쯤 대학원 교수님의 지도하에 도쿄를 갔습니다. 자유롭게 다니는 일정은 아니었지만, 신주쿠나 긴자와 같이 도심에서 스마트팜을 운영한 것을 봤고, 몇 년 뒤 우리나라에도 들어옵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격차가 예전에는 30년이 난다는 자조적인 평가가 있었지만 점점 그 격차가 줄어들었고, 최근에는 거의 없거나 2~3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올해 설 연휴에 일본여행을 기획하면서 지난번과 같이 일본에서 괜찮은 아이템이 있으면 부업이나 해볼까도 생각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여행을 갔다 오고 나서 많이 슬퍼졌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일본에 대해 느낀 것은 '나라가 낡아간다'는 것입니다. 제 친구 중 한 명은 도쿄가 재미없어서 안 간다고 합니다. 유럽 도시들 마냥 갈 때마다 변화가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정도면 다행이겠지만, 17년 전과 비교해서는 확연히, 8년 전과 비교해서도 다른 모습들이 여실히 있었습니다.
제가 묶었던 숙소는 도쿄역과 긴자와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높은 사무 빌딩이 많은 곳으로, 아침이면 출근하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예전 같으면 젊은 2-30대 직원들이 많이 보였을 텐데, 대부분 40-50대의 아저씨들이 한창 일하는 사람들 같이 백팩을 메거나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고 바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상점이나 음식점에서 20대 직원들을 간혹 볼 수는 있지만, 손이 많이 느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전초밥집을 여러곳 다녔는 데, 젊은 직원들이 있는 곳은 주문을 해도 속도가 느리고, 50대 아저씨들이 하는 초밥집이 주문 즉시 음식이 나왔습니다. 드럭스토어에서 손님들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하고 응대를 먼저 하는 것은 중장년 직원들이었고, 젊은 직원들은 마주치기가 쉽지 않고, 손님 응대도 그리 능숙하게 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시부야에 있는 돈키호테를 가서 화장실을 물어보니 '2층'이라는 짧은 답만 하고 자리를 떠나던 직원이 생각납니다. 예전 같으면 자세히 알려주거나 정 안 되면 직접 데려다주던 것에 비교하면 너무 달라졌습니다. 가게의 물건 진열장마다 '물건 절도는 범죄입니다'라는 일본어 경고 문구가 있었고, 드럭스토어의 약장에서 천 엔, 즉 만원 이상의 고가 물건들은 빈 상자로 진열되어 있어서 그걸 들고 계산대로 가면 물건을 내주는 방식도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정작 일본 특유의 친절함은 가게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이 정확한 일본어로 말하면서 보여줬습니다. 편의점 계산대를 책임지는 흑인 친구들도 있었고, 중앙아시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계산원은 손님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느낌들이 저만의 사견은 아닐까 싶었는 데, 일본의 유명한 경제신문인 닛케이 신문사가 전자신문을 광고하면서 젊은 모델들이 업무회의에서 의견을 내지 못하거나 단순한 표현만을 반복하는 모습, '위험해'와 '대단해'만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를 극복하는 데 자사의 신문이 필요하다는 광고를 지하철 문에 실었습니다.
https://www.nikkei.com/promotion/campaign/2023ugoku/
젊은 세대가 의견 표현을 하지 않거나 단순해지거나 극단적으로 변해버린 세태를 반영하는 광고인데, 제가 겪었던 여러 일들과 부합이 되면서 이미 사회현상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술물품과 가죽공예와 같이 쉽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팔았던 도큐핸즈는 다이소처럼 잡화점이 되어버렸고, 백화점의 디저트들은 우리나라 백화점과 다를바가 없거나 맛이 없어졌습니다. 냄새 안 나는 공중화장실을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일본의 모든 곳을 다닌 것은 아니지만 느낀 것 만으로는 일본보다는 고급스러운 중국에 가까웠습니다.
오래 가는 것은 대부분 좋다고 합니다. 만화 슬램덩크의 배경이 된 에노시마 전철(에노덴)은 작년에 120주년을 맞았고, 도쿄국립박물관은 개관 150주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지하철은 1925년에 첫 운행을 시작했으니 곧 10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좋은 것이 오랫동안 유지된다면 기쁘지만, 관리를 하지 않아서 낡아가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낡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20대에 느꼈던 일본과 비교되면서 한창 호기심 많을 때의 좋은 기억들도 다 같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슬펐습니다.
제 친구한테 이런 얘기를 하니 나라가 낡아가니까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회전초밥을 토할 것 같이 배부르게 먹어도 인당 5만 원 미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파는 곳도 드물지만 있어도 10만 원 가까이 나오니 그 말도 맞는 것 같습니다. 슈퍼에서 장을 봐도 그리 비싸지 않았고, 17년 전에는 겁나서 못 탔던 지하철을 편하게 탈 수 있었던 것도 달라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도 일본과의 격차를 빠르게 좁혔다는 증거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좋은 기분과 함께 막막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하는 것이 세상에서 처음 하는 일일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누군가가 했던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 길을 개척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이든, 자기 사업이든, 아니면 트렌드든, 만드는 사람이나 즐기는 사람이나 처음 하는 것일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빠른 추격자 전략에서 선도자로 가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강조했지만, 막상 그래야 하는 위치에 가까워지니 기분 좋고 으스대는 마음보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함이 앞서는 것입니다.
동시에, 10년 뒤의 우리나라가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갈 것이 걱정됩니다. 낡아가는 대한민국이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는 각자에게 숙제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하고, 외국인들이 아니면 일이 돌아가지 않고, 사람들이 물건을 훔쳐갈까 봐 걱정하고 믿지 못하며, 고치고 개선해야 할 것도 바로바로 손대지 못하는 모습이 안 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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