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모 대형병원의 병원장이 불법의료행위를 하는 PA (Physician Assistant) 간호사를 채용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습니다. PA 간호사는 의사의 진료, 특히 수술을 도와주는 진료보조 간호사를 의미합니다. 미국 등 해외에서는 정해진 범위 내에서 수술도 할 수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규정이 명확하지 않아 의사 대신 수술에 들어가면서도 이에 대한 보호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PA 간호사는 대학병원이라면 없는 곳이 드물다고 합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5천명에 육박한다는 언론 보도도 있습니다. 의료계에서는 PA 간호사가 의사 대신 수술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로 간주됩니다. 워낙 PA 간호사들이 숙달되다 보니 환자들의 만족도를 위해서라도 계속 맡기게 되고, 그러다 보니 수술을 배워야 할 전공의들이 교육 기회를 뺏긴다는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PA 간호사의 업무가 많고 중요한 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PA 간호사가 불법행위에 노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의사는 부족한 데 의사 숫자를 늘리지 않으려는 딜레마에서 시작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의 인구 천명당 평균 의사수 3.58명에 턱없이 못 미치는 2.39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이 숫자는 한의사까지 포함하는 것이고, 한의사를 빼면 1명대로 떨어집니다. 당연히 의사가 부족한데, 국민들은 의사수 부족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의사 1명이 보는 환자수가 상당히 많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일반의들은 하루에 20여명선에서 환자를 본다고 하며, 이보다 더 많은 환자를 보는 것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합니다. 환자를 많이 보고 치료를 많이 해준다고 돈을 많이 받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행위별 수가제'를 채택하고 있어 환자를 많이 볼수록 치료를 많이 해줄수록 돈을 많이 버는 구조입니다. 동네의 대형 정형외과나 통증의학과, 내과에서 하루 수십 명에서 백여 명에 이르는 환자를 받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인구가 줄어들고 고령화가 심화되면서 건강보험 재정의 고갈이 기정사실화 되었습니다. 고령인구는 10년내로 2배 늘어나는 데 의료자원은 그대로입니다. 수가가 낮으니 비급여진료로, 실손보험으로, 미용 분야로 의사들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고령인구 증가는 환자의 증가를 의미하며, 의사가 부족해 병원에 못가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 정부는 여러가지 옵션을 선택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사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 되지 않냐고들 합니다. 이 질문을 '여러분이 내는 건강보험료를 한 30% 올려도 될까요?'로 바꾼다면 쉽게 선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는 방법은 의사 또는 의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늘리는 것입니다. 숫자가 늘어나면 저수가 진료에도 뛰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사숫자를 늘리는 것은 국민들이 좋아합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국민건강을 위해 활약했다는 증거로 내세울 것입니다. 공공의대는 지방 국립대에 설치할 것이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도 환영합니다. 의사협회만 결사반대하고 있습니다.
의사 숫자를 늘리는 첫 번째 방법은 국공립병원에서만 일하는 공공의사를 늘리는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에 이어 윤석열 정부에서도 일관되게 의대정원 확대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공공의대의 형태로 국립대에 의대를 설치하는 정책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만큼 정치 성향과 무관한 국정과제이고, 실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른 방법은 의사가 독점적으로 쥐고 있는 권한들을 다른 직군에 분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의사의 권한이 막강합니다. 모든 의료시술은 의사가 하고, 일부만 다른 사람에게 처방하거나 지시해서 진행하는 형태입니다. 그중 가장 독점적인 것이 진단, 수술, 투약입니다. 이를 다른 직군에도 개방하는 것을 정부가 검토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단권은 한의사들의 의료기기 사용으로, 수술은 PA 간호사 양성화로, 투약은 성분명 조제로 대응하거나 전문의약품을 일반의약품으로 돌리는 방법입니다.
법률 쳬계에서도 독립 간호사법의 통과는 의사 중심으로 짜여있는 의료법의 구조를 해체하는 촉매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PA 간호사의 존재가 알려지면 국민들에게 '얼마나 의사가 부족하면 간호사들이 수술을 다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할 것입니다.
제가 의사협회 회장이라면 정부의 모든 협상을 거부할 것입니다. 협상에 나가서 얻는 것은 없고 잃을 것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하는 일이 없다는 내부 비판에 직면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몇 년 전 전공의 파업처럼 강경책으로 나서게 되면 의사숫자를 늘리는 데 정당성만 부여합니다. 얼마나 의사 숫자가 적으면 전공의 몇백명 파업에 온 나라의 환자들이 겁을 먹어야 하냐는 비판이 쏟아질 것입니다. 이래저래 진퇴양난입니다. 끊임없이 협회장을 탄핵하고 다시 뽑아 협상 자체를 할 상황이 아님을 보여주고 시간을 끄는 것이 차라리 좋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년 전 보수정당의 유력 정치인이 의사협회를 방문했습니다. 수술실 CCTV 설치 문제가 이슈였을 때인데, 의사협회는 정치성향만 보고 의사들의 권익을 옹호해 줄 것이라고 판단해 방문일정을 잡았습니다. 정작 해당 정치인은 수술실 CCTV는 반대하면서도 그 대안으로 의료과실의 입증책임을 의사가 하면 된다고 발언했습니다. 의료소송을 쉽게 시작할 수 있는, CCTV보다 훨씬 더 파급력이 크고 의사들에게 불리한 정책이었기 때문에 이를 진화하느라 의사협회에서 진땀을 뺐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10만명의 권리를 희생해서 백만 명이 이익을 본다면 표를 계산해서 행동에 옮깁니다. 그 10만 명이 사회적인 약자가 아니라면 더더욱 쉽게 추진합니다. 각자의 권리는 소중합니다. PA 간호사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의사 숫자 확충이라는, 누구에게는 치명적일 정책 추진에 모두가 최대한 만족할 만한 방안이 나오길 기대할 뿐입니다.
'사회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대면 진료, 이젠 솔직해 집시다. (0) | 2023.04.21 |
---|---|
순리를 따르면 살려는 드릴께? (1) | 2023.04.17 |
결혼식은 스드메, 장례식은 수관함 (수의, 관, 유골함) (0) | 2023.02.11 |
결혼의 사회학 (0) | 2023.02.06 |
낡아가는 일본, 슬퍼지는 청춘의 기억 (0) | 2023.01.27 |
한의학(특히 온병학), 사회문제, 경제경영 분야에 대해 글을 쓰는 한의사입니다.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펼쳐놓는 공간입니다.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