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자존 역천자망(順天者存 逆天者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을 따르는 자는 살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말입니다.
윗글의 출처를 명심보감으로 많이 듭니다. 명심보감의 천명편에 나와있는 데, 정작 명심보감은 천명에 대한 여러 고전을 인용하면서 제일 먼저 맹자를 언급합니다.
명심보감에서 인용한 맹자의 말은 이루(離婁)편에서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孟子曰:「天下有道,小德役大德,小賢役大賢;天下無道,小役大,弱役強。斯二者天也。順天者存,逆天者亡。
뜻을 새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천하에 도(道)가 있을 때에는 덕이 작은 사람이 덕이 큰 사람에게 부림을 당하고, 조금 현명한 사람이 크게 현명한 사람에게 부림을 당한다. 그러나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힘이 적은 사람이 힘이 센 사람에게 부림을 당하고, 세력이 약한 사람이 세력이 강한 사람에게 부림을 당한다. 이 두 가지는 자연의 이치와 형세이니,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자는 살고,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
세상에 도가 있으면 현명하고 덕이 얼마나 있는 지에 따라 다스리는 사람이 결정되고, 도가 없으면 덕이나 현명함이 아닌, 크고 힘이 강한 자가 약하고 작은 자들을 부려먹습니다. 도가 있고 없는 세상은 자연의 이치이니 이를 따르면 살고, 거스르면 망한다는 의미입니다.
표현만으로는 그 당시의 왕이나 제후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맹자는 '민심이 곧 천심'이며, 역성혁명을 주장한 것을 생각하면 민심을 거스르지 말라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위 구절을 인용하면서 순천자존(順天者存)이 순천자흥(順天者興)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쉽지 않은 데 잘 따르면 생존에 좀 더 무게가 실린 '존(存)'보다는 이왕 잘 되는 의미가 있는 '흥(興)'이 대비가 선명해서 그렇게 알려진 것 같습니다.
자연의 섭리는 냉혹합니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연은 필요하면 생존을 허용하고, 필요없으면 도태시킵니다. 민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큰 지지를 받던 정치인들이 하룻밤 사이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민심의 변화는 곧 세상의 변화니, 그 변화에 적응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도 별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어르신들의 말 중에 '살다 보면 좋은 날 오겠지'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기 보다는 운이 좋아야 하는, 소극적인 느낌이 많이 드는 말입니다. 그러나 각자 삶의 양식이 고정되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정해지면 변화가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큰 흐름에는 따라가야 하니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생존이 큰일입니다.
당장 최근 몇년간 겪었던 코로나와 인플레이션의 고통은 일상의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합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좀 더 멋있어 보이고, 많이 가진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엄청나게 풀린 유동성은 벼락부자와 벼락거지들을 만들었습니다. 금리인상으로 돈줄을 1년 남짓 조이자 워런 버핏의 말처럼 '누가 벌거벗고 수영을 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상을 큰 변화 없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 복(福)인 시기입니다.
맹자가 활동하던 전국시대는 춘추시대의 미약한 질서 개념조차 사라진, 약육강식의 시대였습니다.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고, 백성들은 고통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한 나라를 움켜쥐던 권신(權臣)들이 하루아침에 죽거나 쫓겨나는 일도 다반사였던 시기, 맹자는 민심이라는 큰 흐름을 따르고 적응해야 그나마 생존할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엇인가 흥하려면 존재가 기본입니다. 자연의 섭리는 생존과 도태만 있습니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변화하고, 수습하는 사이클은 꼭 동양철학에 근거를 찾지 않더라도 생명의 생존 과정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생존 과정에서는 변화가 필수고, 그 과정에서 소위 '잘 나갈 때'가 있습니다. 이를 자기가 잘 했다고 교만을 보이면 자연은 오래지 않아 흥함을 거둬가 버립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겸손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영화 '신세계'에서 이중구는 한참 높은 선배들에게 자기 편으로 서는 대가로 '살려는 드릴게'라는 말을 합니다. 순천자존 역천자망(順天者存 逆天者亡)이라는 말은 이중구의 역할을 하늘로 바꿔놓은 것 같습니다. 하늘을 따르면 살려는 준다는 말, 어이가 없어 보여도 삶의 경험이 쌓일수록 와닿는 표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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