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정원 문제가 총선을 앞두고 다시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작년에 천여 명 증원 얘기가 나오다가 잠잠해졌는 데, 이번에는 2천 명을 증원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당연히 의사협회는 반대하고, 정부는 의사협회(의협)와의 협상 없이 증원을 강행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공식 발표가 아닌 고위 관계자의 인터뷰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의협은 의정협의체라는 협상의 틀 안에서 의대 증원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협상이니까 한쪽이 강제로 끌고 나갈 수 없는 구조이며, 시간은 의협의 편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은 정책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의지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의대 정원 문제는 총선과 같은 대형 정치 행사가 끝나면 조용해지고, 조금만 더 버텨서 대선까지 넘기면 다시 원점에서 시작합니다. 의협 입장에서는 현상 유지가 최종 목적일 것입니다.
정부에서 이를 극복하려면 협상을 무시하고 국민 여론에 따라 밀어붙여야 하는 데, 그 순간 협의체는 파기되고 의협의 대정부 투쟁이 시작됩니다. 이번에 2천 명 증원을 밀어붙인다면 이전의 전공의 파업이 아닌 전공의들이 일제히 사직하고 의대생들이 집단 휴학을 하는 등 강경책을 동원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전 공공의대 의사 파업에서도 나타났듯이 개원의들의 파업 참여율은 한 자릿수이고, 천여 명이 안 되는 병원 전공의들이 대정부 투쟁의 열쇠를 쥘 것입니다.
전공의들이 파업을 하면 정부로서는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업무복귀명령 정도인데, 만약 전공의들이 그 동안의 수련 경력을 버리고 일제히 사직 투쟁을 해버리면 정부로서도 마땅한 방법이 없습니다. 사직서가 수리되면 복귀할 업무가 없어지고, 사직수리가 안 되더라도 전공의 몇백 명의 사직서가 쌓이는 것만으로 강력한 투쟁 수단이 됩니다. 1년에 3천 명 정도 의대생들이 졸업하는 데, 집단 휴학을 하면 1년간 의사 3천 명이 부족해집니다. 리더십에 따라 참여율이 다르겠지만, 70% 이상 참여율만 확보되면 정부로서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의사 파업은 처음에는 파업에 참여한 의사들을 환자를 내팽개치고 돈만 바라봐서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다 의사 파업으로 인해 응급환자가 사망하거나 수술이 밀리기 시작하면 의사뿐만 아니라 문제를 이 지경까지 방치한 정부까지 비난의 화살이 쏟아집니다. 그 결과 정부는 의사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사태를 수습하게 됩니다. 의약분업 때는 분업에 합의하는 대신 의대 정원 축소와 진료수가 상승을 받아냈고, 공공의대 도입 때는 전공의 파업을 통해 코로나19 안정 이후로 논의를 미루었습니다.
이렇게 첨예한 의대 정원 증원 문제, 과연 의사숫자를 늘리는 것만이 능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국가들의 인구당 의사숫자를 근거로 증원을 주장합니다. 의사수가 부족해서 필수의료를 못 받는다는 주장입니다. 그에 비해 의사협회는 앞으로 인구가 감소하는 것과, 의사 수 부족이 아닌 저수가가 원인이라고 합니다. 저는 양쪽 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했다고 봅니다.
먼저 OECD의 인구 천명당 의사숫자는 각 국가의 의료체계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 비교입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인구천명당 의사수가 2명대로 낮은 편이고,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3명대입니다. 단순하게 보면 유럽이 의사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최근까지 우리나라의 의료접근성, 의료수가, 의료의 질에 대해서는 만족감이 높았습니다. 이는 유럽과 우리나라의 의료체계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우리나라는 의사 수는 적지만 환자들의 병원을 쉽게 갈 수 있습니다. 평균 1년에 15번정도를 갑니다. 그에 비해 유럽국가들은 3~4회 정도입니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비슷해서 1년에 평균 11번 정도 병원에 갑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행위별 수가제라 의료기관을 개설하고 인력을 고용하고 병원을 운영하는 것을 의사의 책임으로 돌리는 대신 의료 행위를 많이 할수록 돈을 많이 주는 구조입니다.
당연히 행위당 수가는 낮아서 필수의료를 포함해 각종 의료시술이 시장 금액의 70% 이하로 책정되었고, 이 때문에 병원은 환자를 많이 보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환자가 많지 않은 질환인 경우 진료를 볼수록 손해를 봅니다.
유럽국가들은 쉽게 얘기하면 공무원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환자를 많이 본다고 돈을 더 주지 않습니다.
영국이 대표적인데, 일반의들은 하루에 보는 환자수를 많이 가져가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환자를 많이 보면 불평불만을 하는 것이 영국인데, 유럽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독일은 병원이 일정 숫자 이상의 환자를 보면 볼수록 환자가 본인 부담금을 늘리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환자 한 명 한 명을 꼼꼼하게 보고 대신 병원을 쉽게 못 가는 구조입니다. 독일이나 영국 여행을 가면 길거리 곳곳에 수많은 약국이 있는 것도 우리나라에서는 동네 병원에 갈 증상을 약국에서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일본과 우리나라 의료 체계가 유사한데, 일본은 의대 정원을 늘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최근 보건복지부 장관이 일본의 사례를 듣겠다며 찾아갔습니다. 일본은 의대 정원을 늘리면서 지역의사제를 도입했습니다. 졸업하면 해당 지역에 일정 기간 근무하는 의사를 만드는 것인데,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입니다. 다만 지역의사들이 의무 기간이 끝나면 도쿄 같은 대도시로 이동하는 것도 여전합니다.
정부는 일본의 사례를 들면서 의사 정원을 늘리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정작 일본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나는 필수의료에 대한 수가를 높이는 것과, 다른 하나는 건강보험 재정에서의 국고 충당률입니다.
필수의료는 병원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데, 일본정부는 직접적인 수술 행위에 대한 수가뿐만 아니라 이를 수행하는 의료인력에 대한 당직, 휴일과 심야 추가근무 등 제반여건에 대한 수가를 상당히 높였습니다.
또한 일본은 건강보험 재정의 28%가량을 국고로 충당하는 데, 우리나라는 15%선에서 크게 늘지 않고 있습니다. 이마저도 법에서 지정한 20%에 미달하는 것입니다. 필수 조항이 아니어서 그렇겠지만, 유럽국가들의 60%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고, 비슷한 의료체계라는 일본에 비해서도 훨씬 적습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정부가 재정 투입을 안 해서 국민들이 내는 건강보험료(건보료)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게다가 건보료는 다른 공보험과 달리 소득에 따라 책정되며 상한선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퇴직연금이 널리 보급되지 못하는 것도 퇴직연금을 소득으로 보고 건보료를 떼어가서 실질연금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재정 마련에 대한 약속은 없이 의사수를 늘려 경쟁을 통해 저수가에 달려들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정말 필수의료에 대한 공급이 부족하고, 의사가 부족하다면 필수의료와 이에 필수적인 의사자원을 늘려야 합니다.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하지만 문제 해결은 계속 겉돌고 있습니다.
의사 숫자가 증가하면 개원가에 직접적인 타격이 생기니 개원가를 주로 대표하는 의협에서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무너지는 필수 의료 체계를 유지해야 하나 세수부족으로 투입할 재정은 마땅치 않으니 의사 빼고 다 좋아하는 의사수 증원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필수의료 수가 상승도 재정의 추가 투입 없이 수가만 높이면 동네의원에 대한 수가를 빼서 넣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잘하는 큰 병원 좋아하니 팍팍 밀어주자는 거 아니면 언발에 오줌누기입니다.
개원가로 의사들이 몰리는 이유는 저수가에 있습니다. 수가 정책을 총괄하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운영하는 병원도 진료만으로는 적자고 장례식장과 부대시설로 이익을 내서 장부를 맞춘다고 합니다. 그 동안 저수가를 비보험 진료로 메꿨는 데, 이마저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줄어드니 병원들이 견디지 못하고 폐업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혹자는 변호사 숫자를 비교할지 모르겠습니다. 변호사들의 숫자가 늘었지만 법률 시장이 커지고 변호사를 더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문직으로서의 비교는 일리가 있지만, 변호사들의 수임료는 국가가 강제하지 않는 점이 다릅니다. 만약 변호사들의 수임료를 국민건강보험처럼 강제로 정해서 준다면 같은 평가가 나왔을지 의문입니다.
의사 숫자 늘린다고 소송 등 리스크와 장시간 근무를 선뜻 받아들이는 의사가 얼마가 될지 의문입니다. 정부도 국민들이 위급한 병을 치료도 받지 못한 채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극단적인 의사-정부 투쟁이 생기면 피해를 보는 것은 환자들입니다. 정부는 의사 정원 확대를 해결책으로 정했다면 애매모호한 정책 패키지가 아닌 건강보험 재정 국고지원금 상향 등 재정투입을 전제한 수가조정을 조건으로 설득을 해야 합니다. 어차피 저출산 고령화로 의료 수요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건강보험 체계의 개편은 필요합니다.
국민의료보험의 도입 이후 의료 시스템은 크게 바뀐 게 없습니다. 의료법부터 1973년에 제정된 후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최근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저출산 고령화라는 사회 전체가 겪고 있는 변화의 한 단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3/11/18/UJ6SKXG7IJFT7DTFQ4KZ453E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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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특히 온병학), 사회문제, 경제경영 분야에 대해 글을 쓰는 한의사입니다.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펼쳐놓는 공간입니다.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