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의대 증원 규모가 발표되었습니다. 총 1만 명을 늘린다는 전제하에 5년간 매해 2천명씩 입학 인원을 배정한다고 합니다. 발표가 나기 전 아침에 의사협회(이하 의협)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파업을 예견했습니다. 예전 의약분업 때 줄였던 3백 명 규모에서 협상 줄다리기를 하다가 2천 명 규모로 발표가 나니 의협은 파업 외에 딱히 선택지가 없어 보입니다.
2020년의 파업 경험이 있어 그런지 정부도 파업에 대비해 각 병원 수련의들을 미리 단속하고 있습니다. 사직서를 내도 형사 처벌을 할 수 있다는 등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지 않은 내용도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설 연휴가 지나면 의협은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체제로 갈 것이고 파업의 수위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번 2천명은 상당히 큰 규모의 증원으로 총선용 공약입니다. 10여 년간 지지부진하던 GTX를 갑자기 빨리 착공하겠다는 식의 기조와 유사합니다. 5년간 2 천명씩 늘려서 뽑아놓고는 그 인원을 갑자기 줄인다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급조한 정부 정책입니다. 그러나 증원을 확실시했기 때문에 의사들의 파업은 시간문제로 보입니다.
제가 의협의 비대위원장이라면 총선까지 한달동안 전 의사회원에게 집단 휴진을 독려할 것 같습니다. 지난 공공의대 의사파업은 전공의들이 중심이 되었고, 개원의들은 한자릿수의 참여율을 보였습니다.
이번의 의료정책은 의협 개원의들에게도 불리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급여-비급여 혼합진료 금지와 미용 의료 개방입니다. 정부 수가로는 병원 운영이 불가능한데 이를 보조하는 것이 비급여와 실손이며 미용진료입니다.
사실상 급여 치료만 하라고 개원가를 몰고 가니 개원의들도 투쟁을 할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나만 파업하고 다른 원장들이 파업하지 않으면 자기만 손해 보고 투쟁은 금방 와해될 것입니다. 리더십의 문제입니다.
전공의들의 집단사직과 의대생들의 휴학은 걸림돌입니다. 정부가 이번에 머리를 쓴 게 의대생들이 집단 휴학과 국시 거부를 못하도록 연초에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정원 천명 증원 이야기는 지난 가을에 나왔는 데, 막상 직접 발표하지는 않았습니다. 국시 거부로 몇천 명의 의사가 배출되지 않았을 때의 뒷감당을 못하겠다는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연초라 본과 4학년 졸업반의 휴학이 있다고 해도 그 사이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전공의들의 사직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전공의가 없으면 병원이 잘 돌아가지 않고, 응급 대처도 미흡해집니다. 수술도 밀리다가 어느 순간 응급실 뺑뺑이로 사망하는 환자들이 속출할 것입니다. 진짜 파업은 이때 부터입니다. 총선까지 이슈화가 크게 된다면 정부를 말리는 제스처가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여야가 의대 증원에 찬성이라 총선이 지나서 새로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새로 국회가 구성되면 다시 협상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협상 과정에서는 총력 투쟁 대신 태업의 형태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준법투쟁도 고려해볼만 합니다. 그동안 현장에서 편법 또는 불법이지만 관습적으로 넘어갔던 사안들을 법을 지키면서 진료를 하는 것입니다. PA 없이 법대로 의사들이 수술을 진행하거나 비급여 없이 급여로만 치료를 하는 것입니다. 수술이 밀리거나 수술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것입니다. 파업의 비난은 면하면서도 정부를 압박할 수단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건강 보험 기금화를 전제로 의대 증원 수용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건강보험 예산을 가입자로부터 받고 세금과 같이 강제적으로 징수하는 형태로 운영되지만 정작 국회의 예산 심의를 받지 않습니다.
80조에 달하는 돈이 건강보험공단과 보건복지부의 쌈짓돈처럼 운영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국고 지원을 다 받을 수 있는 데도 기획재정부(기재부)의 입김이 강해질 까봐 국민들의 보험료를 올릴 생각은 하면서 복지부의 예산 권한은 내려놓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가 그토록 좋아하는 OECD에서도 매우 특이한 제도라고 하면서 건강보험 예산의 기금화 또는 그에 준하는 정부 심사를 받는 것을 권장할 정도입니다. 그동안 의협은 복지부와 함께 기금화를 반대해 왔습니다. 국회 예산 심사를 받으면 복지부뿐만 아니라 의협의 영향력도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바뀌어서 건강보험 재정 고갈은 가속화되고, 담당부처인 복지부는 의협이 가장 민감해하는 정원 문제에서 의협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건강보험 재정이 고갈되면 그 이후로는 매우 보수적인 운영이 시작됩니다. 의협 입장에서는 정부부처 중 가장 힘이 센 기획재정부와 협상해 국고 지원 증액과 의협에게 유리한 정책을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기금화를 찬성해 주고 주요 협상 부처를 기재부로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경우 복지부는 80조 가까운 예산 운용 권한을 기재부와 나눠야 하는 입장이 됩니다. 국민들에게는 국고 지원을 통해 납부할 보험료를 줄이겠다고 홍보하면 될 것입니다. 의사 말고 모두 좋아하는 의대 정원 증원을 밀어붙였으니, 복지부 빼고 모두 좋아하는 건강보험 기금화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해서 의대증원이 중요하다고 믿으면 진지하게 기금화에 임할 것이고, 부처 이기주의가 발동한다면 나름 협상을 지연시키는 효과가 날 것입니다.
간호법과 달리 이번 의대증원은 의협을 편들어주는 보건의료단체나 정치세력이 없습니다. 그 동안 다른 보건의료직역에게도 각을 세우고 무시하던 태도가 의협의 고립을 자초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의협 스스로의 힘으로 투쟁을 이끌어나가야 합니다. 죽기 살기로 투쟁을 해야 2천 명 증원을 줄이는 협상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파업에 임하는 우리나라 의사들은 1960~70년대 일본의 의사파업과 같이 의사들이 정부를 일방적으로 이기는 상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때 일본의사들은 치과의사와 약사라는 우군이 있었고, 투쟁을 주도하는 대표들이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했습니다.
의협 입장에서 의사 빼고 모두가 적인 지금의 의대정원 문제, 어떻게 진행될지 참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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