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인가?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 망설임 없이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정치권에서는 지난 20여 년간 끊임없이 개헌이 거론되어 왔습니다. 이는 가장 상위법인 헌법조차 시대의 변화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이지만, 법률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한국이 아직 선진국이 아니라는 현실을 체감하게 됩니다. 이는 뿌리 깊은 사법 불신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조차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법을 빈번하게 활용하고, 같은 사안에 대해 정반대의 법률 해석을 내놓는 법학 전문가들은 어느새 일상이 되었습니다. 일반 국민들이 사소한 일에도 쉽게 ‘소송’을 언급하는 현실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정부조차 정책 실패로 발생한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면서, “불만 있으면 소송하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소송공화국의 실태
나라마다 법 체계가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우리와 법 체계가 유사한 일본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2012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민사소송 제기 건수는 한국이 2,627건으로, 일본 589건의 약 4.5배에 달합니다. 프랑스의 2575건, 영국의 2413건과 비슷하고, 독일의 1961건보다는 30% 많습니다. 소송공화국이라 불리는 미국은 인구 10만명당 5,132건으로 한국의 2배 정도입니다. 소액사건도 소송으로 집계되는 나라들을 제외하면 한국도 수준 높은 ‘소송공화국’이라 할만합니다.
로스쿨 제도로 매년 수많은 변호사가 배출되고 있지만, 소송 수요가 충분한 탓인지 수임료는 좀처럼 내려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법’은 많은 이들에게 실생활의 갈등을 조율하는 수단이 아닌, 갈등을 확대하고 정당화하는 도구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형식은 법치, 내용은 미성숙
한국이 외형적으로는 법치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법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전문가도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에서 느낀 문제의식을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우리 법체계는 대륙법 계열이고, 법전의 분량도 날로 두꺼워지고 있습니다. 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드물고, 대부분은 ‘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 불신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곧바로 소송부터 떠올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법을 ‘믿기 때문에’ 따르기보다는, ‘신뢰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경향이 강합니다. 법은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면서 동시에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라고 여겨지는 이중적 인식이 존재합니다. 정말로 공정한 법이라면, 그것을 어기는 행위는 도덕적으로도 용납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사람들은 법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걸리면 운 없는 일’, '관재수'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치의 뿌리는 짧고, 토양은 척박하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실질적인 법치 사회로서의 역사와 문화가 매우 짧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우리는 ‘헌정 70년’을 말하지만,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 한국전쟁과 30여년간 긴 군사독재가 지속되었고, 본격적인 권위주의 청산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입니다. 그나마도 실질적으로 법이 사회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겨우 30년 남짓에 불과합니다.
반면 우리가 수입한 근대 법체계, 즉 대륙법은 수백 년에 걸쳐 다듬어진 것입니다. 나폴레옹 법전, 더 나아가 로마법에까지 이르는 유럽의 법 전통은 오랜 시간 동안 개인 간 계약을 중심으로 쌓인 신뢰 기반 위에 세워졌습니다. 중세 농민과 영주, 영주와 왕 사이의 계약이 국가 체계로 확장되어 온 것입니다.
한국의 전통은 다릅니다. 우리는 법보다 도덕성과 지도자의 덕에 의존해왔습니다. 한국의 지배사상 중 하나인 유교는 ‘백성을 잘 교화하면 법이 필요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법과 양심이 일치하는 이상사회를 지향한 것이지만, 그런 이상사회는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도덕성을 외치는 엘리트들이 법과 현실의 괴리를 악용하고, 일반 국민들은 법에 잘못 엮이면 ‘재수 없다’는 식의 회의감을 가질 뿐입니다.
소송이 아니라 신뢰가 해결책이다
판사 수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지만, 저는 오히려 소송으로 가지 않아도 될 문제들이 법정으로 몰리는 현상이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과거 농촌 공동체가 유지되던 시기에는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와 자율적 조정이 작동했습니다. 불합리한 측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소송이 흔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20년간 공동체 질서는 해체되었고, 사람들 간 다툼은 증가했으며, 이를 중재하는 유일한 수단이 소송이 되어버렸습니다. 정치의 사법화는 단순히 정치의 후진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사회의 중재기능이 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보는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 병원만 찾는다고 건강해지지 않듯, 분쟁을 소송으로 해결한다고 사회가 더 공정해지지는 않습니다. 평균 수명의 증가는 의학 기술보다도 위생, 영양, 생활환경의 개선 덕분이었습니다.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쟁이 줄어드는 사회는 소송 제도 뿐만 아니라, 높은 시민의식과 공정한 자원 분배, 안정된 사회 시스템에 의해 가능해집니다.
결론: 진정한 법치는 제도보다 문화다
결국 법의 신뢰는 제도나 조항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고 해석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성숙도에서 비롯됩니다. 진정한 법치란, 법을 무기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모두가 공유하는 공정한 질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와 구조적 기반이 갖추어지기 전까지, 한국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법치국가인가에 대한 답변은 여전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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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