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이 있을까요? 짧게는 맛있는 것을 먹고 잘 자고, 활기찬 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길게는 재산을 늘리고, 이름을 알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특히 코로나 이후부터, 사람들은 과연 하고 싶은 것이 꼭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사회 전체를 지배하던 목표였던 '선진국' 진입은 2010년대 중후반에 달성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제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선진국이 되고 나서 보니, 강대국이 되어도 머리 아픈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선진국이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양극화, 저성장, 관계 단절 같은 수많은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더 좋아지기 어렵다"는 집단적 인식이 사회의 역동성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2000년대부터 최근 20년 동안,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식 속에 살았습니다. 2002년 월드컵은 그 정점이었고, 이후 세계 속에서 하나씩 인정받으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워왔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진국이 된 지금, 더 이상 따라갈 나라가 없습니다. 물론, 부자들은 여전히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7~80년대처럼 암울한 미래를 피해 선진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힘들게 번 재산을 지키기 상속세 등 세금 부담이 낮은 나라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상속세를 유산취득세로 바꾸려는 논의도, 부자들을 국내에 남게 하려는 전략의 일환입니다. 예전 같으면 '부자들만 배불린다'는 반대 여론이 들끓었겠지만, 이번에는 조용히 추진되고 있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그만큼 바뀐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반증 중 하나로, 저는 'ㅇㅇ공화국'이라는 표현이 사라진 것을 들고 싶습니다. 과거에는 '아파트공화국', '사교육공화국', '서울대공화국'에서 '커피공화국', '치킨공화국'까지, 사회 전체가 열광하며 무엇인가에 몰두했습니다. 최근 2~3년간에도 몇몇 단어가 등장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극복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것이 더 이상 하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야 장애물을 찾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사회 문제라면 싸움도 불사했을 것입니다. 어떤 집단이 이를 가로막으면 '카르텔'이라고 비판하고, 분노를 모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의사들과의 싸움'이 이 형태의 마지막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싸울 일도, 싸워야 할 이유도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무기력은 개인 간 유대감의 약화를 가져옵니다. 머리를 맞대야 할 이유가 사라지면서, 남는 것은 결국 '사업이나 투자를 잘 해서 부자가 되자'는 개인적 생존 전략뿐입니다. 그러나 빽빽하게 얽힌 규제 사회에서 대부분은 포기하고, 근근이 살아가는 쪽을 선택할 것입니다.
한때 사회를 지배했던 학벌은 인구 감소로 무력화되고 있습니다. 아파트 가격도 고급 주거지를 제외하면 하락세입니다. 저출산은 그 결과입니다. 겉으로는 저출산을 문제 삼지만, 근저에는 "하고 싶은 게 없는 사회", "출산조차 하고 싶지 않은 사회", 그리고 전체적으로 우울한 사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은 태생적으로 이상주의가 강한 나라입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강국과 국경을 맞대고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운이 좋을 때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운이 나쁠 때는 눈치를 보며 버텨야 했습니다. 때로는 외세에 짓밟혀 자존심마저 뭉개진 시기도 있었고, 그런 시기마다 이상주의가 광풍처럼 몰아쳤습니다. 조선 후기의 교조적 성리학이나, 근대기의 이념 난립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현실을 외면한 채 이상을 절대화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집단적 우울증을 낳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상을 외치는 사람들조차 종종 그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 했습니다. 예컨대, 의사 집단이 과학적 방법론을 내세우면서 정작 자신들의 의견만을 '과학'이라 단정짓고, 다른 의견은 '비과학'이라 몰아붙인 것처럼 말입니다.
지정학적 여건을 생각하면, 이러한 이상주의는 생존을 위한 심리적 장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강대국은 현실과 이상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거나, 설령 현실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이상으로 이를 꾸미려 하지 않습니다. 조선 후기의 교조적 성리학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강화된 것입니다. 결국, 이상주의는 무기력과 사회적 우울증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상주의를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빠른 발전을 위해 집단의 에너지를 결집하는 데, 이상주의만큼 유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상을 다시 설정해야 할 시기에 와 있습니다.
첫째,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자기 사상'을 창조해야 합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사상을 외부에서 수입해 왔습니다. 유교와 불교는 물론, 근대 이후에는 서구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모델을 빠르게 받아들였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 역시 외래 사상의 변형이었습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독일식 관료제를 혼합한 이 체제는 단기간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지만, 그만큼 깊은 그림자도 남겼습니다. 성장의 속도에 취해 사회적 합의나 제도적 세련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채 밀어붙인 결과입니다.
운동권의 '종속이론', 2000년대의 '신자유주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외부에서 생산된 사상을 충분히 재해석하거나 현실화하지 못한 채, 그대로 들여와 적용하려 했던 시도들이었습니다. 북한도 예외는 아닙니다. 초기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한 전형적인 공산주의 국가였지만, 공산권 붕괴와 냉전 종식이라는 국제 질서의 변화 속에서 방향을 틀었습니다. 공산주의가 가장 경계하던 전체주의적 사상, '주체사상'을 내세우며 사실상 세습 왕조 체제로 퇴행한 것입니다. 사상을 자체적으로 만든다고 해서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북한은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에는 ‘사상의 국산화’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더 이상 외부 이념을 수입해 조립하는 방식으로는 우리의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한국 사회의 구조와 정서, 역사적 맥락을 반영한 자체 사유 체계, 다시 말해 맞춤옷 같은 사상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우리의 언어로 해석하며, 우리의 경험에서 길어낸 사유가 되어야 합니다.
'수입 사상'은 출발선이 될 수는 있지만, 도착지를 안내해주지는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은, 외부에서 들여온 완제품을 입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지정학적 조건, 사회적 경험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재단하고 짓는 고유한 사상입니다. 그것은 단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우리의 사회 제도, 경제 구조, 교육 방향에까지 깊이 작용할 새로운 질서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의 유수한 선진국들, 특히 강대국들은 예외 없이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둘째, 지정학적 불안을 극복할 구체적 전략과 이상을 설정해야 합니다.
현대사에서 가장 뚜렷한 사례는 미국입니다. 미국은 1900년대 초부터 냉철하게 정의했습니다. "미국이 안전하려면 유라시아 대륙의 양끝—서유럽과 동아시아—에 강대국이 등장해서는 안 된다." 이 전략은 독일과 일본에 맞서 2차 세계대전 참전의 배경이 되었고, 이후 냉전기 동안에도 일관되게 유지되었습니다.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에 대응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전략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미국은 고립주의 전통이 있음에도, 지정학적 리스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단순히 '통일'만 외친다고 지정학적 불안이 해소될까요?
통일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지키고 다투었던 영토를 보면 알 수 있듯, 우리 지정학적 조건은 오히려 주변 강대국들과 끊임없이 힘을 겨루어야 하는 구조입니다.
지금 한국에는 생존과 번영을 위한 장기 전략이 절실합니다.
이것은 몇몇 정치인의 선거 공약으로 소모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수십 년에 걸쳐 토론하고 설계해야 할 과제입니다. 단기적 이익이나 특정 집단의 이해에 좌우되지 않고, 적어도 세대를 넘어 삶의 양식을 규정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해야 합니다.
지정학은 이 전략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한국인의 문화, 역사, 전통, 경제, 자연적 조건까지 포괄하는 종합적 설계가 필요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작업은 우리 시대에 부여된 가장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사회를 깨우는 일은, 그저 작은 유행이나 변죽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성을 다시 세우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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