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료’보다 ‘선택’이 먼저가 되는 시대
한동안 국민건강보험과 관련된 글을 썼습니다. 결론은 단순합니다. 국민건강보험은 유지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곧 우리가 아플 때 ‘치료’보다 ‘선택’이 먼저가 되는 시대가 온다는 뜻입니다. 이 결론이 맞든 틀리든, 중요한 건 그런 방향으로 가는 징후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징후들은 점점 더 우리 삶의 아주 가까운 자리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겉은 조용하지만, 속은 급변하는 의료체계
작년(2024년) 5월부터 지금까지 의료 환경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살펴보면, 표면은 조용해 보여도 그 내부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대 증원 문제는 겉으로는 3058명으로 원상복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그 사이 실손보험 개편, 상급종합병원의 병상 축소, 사직 형태의 전공의 감소, 비대면 진료의 법제화 등 20년간 묶여 있던 정부의 숙원 사업들이 일사천리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정부가 그 동안 “의사들에게 당한 것, 이제는 되갚겠다”는 생각을 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추계위원회를 통해 의대 정원은 이제 정부가 조절할 수 있는 ‘수치’가 되었고, 그나마도 의대 증원은 더 이상 쟁점이 아닙니다. 변화한 의료체계는 '죽을 병이면 살려는 드리되, 그 외는 각자도생'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사실상 의료 민영화'입니다.
건보재정 고갈: 말하지 않아도 현실이 된 위기
이미 건보재정은 고갈되었습니다. 2026년 적자 전환, 2030년 적립금 소진이라는 예측조차 낙관적으로 보입니다. 건강보험 재정 고갈에 대한 신문 기사가 뜸해진 건, 진짜 고갈이 현실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상급병원 구조조정에 매년 3조 원 이상이 쓰이고 있고, 1차 의료기관에는 의료수가를 인플레이션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으로 고정했습니다. 낮은 수가가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부족분을 실손과 비급여로 메웠던 모델이 변화하면서 병원 운영의 목적이 이윤을 남기는 게 아니라 생존을 목적으로 하게 됩니다.
환자 입장에서는 병원에 가도 치료의 질은 낮아지고, 비용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실손보험으로 버티던 개인병원들도, 머지않아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글로벌 흐름: 약가와 의료비를 자극하는 변수들
의료비 문제는 단지 국내 이슈만이 아닙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다시 들어서며, 의약품에도 고율의 관세가 부과될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중국산 물건에 100% 이상의 관세를 부과했을 때, 처음에는 “중국이 다른 나라에 싼 가격으로 덤핑하겠지” 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중국 내 기업들의 수출길이 막히자 아예 공장이 멈춰버렸고, 규모의 경제가 무너지면서 글로벌 공급망은 가격 인상의 도미노를 시작했습니다.
의약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의약품 원료의 7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약가 인상은 시간문제입니다. 약가 담당 공무원이 악명을 감수한다고 해서 구조적 원가 상승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정부는 감당할 수 없는 약가를 마주하고 있고, 이는 건보재정 고갈과 맞물려 필연적으로 치료비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미국 압박과 신약 접근의 불균형
더 나아가, 트럼프 행정부는 협상 테이블에서 ‘한국 건강보험이 미국 제약사의 수익을 가로막고 있다’며 압박을 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약가는 원가 중심으로 책정돼 일부 글로벌 제약사는 한국 시장에 아예 신약을 출시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자 입장에서는 효과가 입증된 약이 있어도 복제약이 나오기 전까지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트럼프가 다른 협상의 대가로 약가 규제를 철폐하라고 요구할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반도체든 자동차든, 미국이 원하는 것을 주는 조건으로 건강보험의 약가 정책을 깰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보편적 건강보장’
이런 흐름 속에서 ‘보편적 건강보장’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닙니다.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의료의 질, 접근성, 비용의 삼박자를 모두 충족시키는 유일한 나라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착시였습니다. 인구 보너스와 고도성장이 만든 환상이었고, 이젠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병원에 안 가고 사는 법”을 찾는 시대
요즘 어르신들이 모인 곳에서는 “어떻게 하면 병원에 안 가고 살 수 있을까?”라는 대화가 오가고, 50대 중반 이상은 카페 속 대화에서 건강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유튜브가 고령층에게 그리 친숙한 플랫폼이 아님에도, 건강 관련 콘텐츠는 놀라울 만큼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현실도 있지만, 그보다는 의료의 접근성과 비용, 그리고 질이 모두 하향세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어떻게 치료받을 것인가”보다 “어떻게 병원에 안 갈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제는 ‘비급여 시대’, 자기 책임의료
앞으로는 국가에서 보장하는 치료는 정말 위중한 질환에만 적용될 것입니다. 나머지는 비급여. 즉, 자기 돈으로 치료받는 시대가 돌아옵니다.
정부는 처음엔 비급여도 규제하고 통제하려 하겠지만, 공급자들이 떠나기 시작하면 가격 통제는 의미를 잃고 시스템은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듣기 싫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의사들은 수익이 줄어들어도 생존합니다. 제약회사나 스타트업으로, 혹은 해외로 떠나면 그만입니다. 영국 NHS가 붕괴될 때, 병원에 남은 의대 동문이 자기 하나였다는 외신 인터뷰와, 영국 의대생과 의사의 3분의 1이 해외에서 일하고 싶다고 조사한 기사가 떠오릅니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을 미래입니다.
개인이 취해야 할 생존 전략
환자가 될 수 있는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으로 병원비는 분명 높아질 겁니다. 실손보험의 보장은 축소되고, 병원은 줄어들며, 병원비는 비싸집니다.
예방이 핵심입니다. 건강검진, 영양제, 생활습관, 운동… 그런 ‘별거 아닌 것들’이 이제는 생존 전략이 됩니다. 의료는 중간이 사라지고 양극화됩니다. 국가는 생명을 살리는 최소치만 보장할 것이고, 나머지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이 변화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자기 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네 병원을 하나쯤 확보하는 것—그게 앞으로의 전략입니다. 여기에 돈을 아끼면 나중에 더 크게 고생할 것입니다. 지금은 무슨 말이냐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국민건강보험이 사라진, 머지 않은 미래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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