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평화 시대의 전시형 세금 체계?
세금과 관련되어 많은 불만이 나오는 가운데, 이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을까 생각해보다가 최근에 유튜브로 봤던 '영웅시대'에서 1960년대가 전시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기억이 났습니다. 우리나라의 세금 제도가 언뜻 보면 일반적인 선진국의 조세 체계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전시 상황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왜 평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세금 체계가 전시 상황의 그것과 닮아있을까요? 이 글에서 이 흥미로운 주제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간접세의 높은 비중: 전쟁과 조세 전략
일반적으로 전시에는 국가가 빠르게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야 하기 때문에 소득과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부과할 수 있는 간접세의 비중을 높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최근 수십년간 전면전이 없었음에도 이런 구조가 상당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부가가치세는 기본적으로 10%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각종 유류세, 주세(술에 부과되는 세금), 담배세 등은 실질 세율이 무려 50~70%에 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유소에서 주유할 때 지불하는 금액 중 상당 부분은 실제 기름값이 아니라 세금입니다. 담배 한 갑의 가격 중에서도 절반 이상이 세금인 경우가 많죠.
이러한 간접세 중심의 세금 구조는 소득이 적은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큰 부담을 주는 '역진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소득자나 저소득자나 동일한 물건을 살 때 같은 금액의 세금을 내게 되니까요. 전시에는 국가 존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채택하는 방식인데, 우리나라는 평시에도 이런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범위한 과세 범위와 벌금성 세금: 징벌과 조절의 도구로
전시에는 정부가 다양한 경제 활동에 개입하고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세금과 부담금을 부과합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요, 교통 범칙금부터 환경개선부담금, 종합부동산세(종부세), 건강보험료(준조세적 성격을 가짐)까지 다양한 명목으로 국민들에게 금전적 부담을 지우고 있습니다.
이런 세금들은 단순히 재정 수입을 확보하는 수단을 넘어서 일종의 '징벌'과 '조절 수단'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종부세는 부동산 보유에 대한 세금이지만 사실상 부동산 가격을 조절하려는 정책적 목적이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건강보험료는 엄밀히 말하면 세금은 아니지만 강제적으로 징수된다는 점에서 세금과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지요.
이처럼 다양한 명목의 세금과 준조세는 징수의 정당성보다는 재정 확보 수단으로 오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국가 재정이 부족할 때 특정 세목을 조정하여 빠르게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은 전시 경제의 특징적인 모습인데, 한국도 이런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기업과 고소득자에 대한 타겟형 압박: '전시 이익자' 논리의 적용
전쟁 시기에는 흔히 '전쟁 부당 이득자', '전쟁 모리배(war profiteer)'라고 불리는, 전쟁 상황에서 오히려 이익을 본 기업이나 개인들에게 초과이득세 등을 부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일부가 과도한 이익을 취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제재의 성격을 띠죠.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리가 적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 대기업이나 부동산 보유자 등을 마치 "적폐"처럼 몰아세우며 추가적인 세금 부담을 지우는 경향이 있는 것이죠. 물론 소득 재분배나 경제적 불평등 해소라는 정당한 목적이 있을 수 있지만, 때로는 이러한 접근이 특정 계층을 '악당화'하면서 세금 정책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타겟형 세금 부과는 전시 상황에서는 국가 존립이라는 목표 하에 정당화될 수 있지만, 평화 시대에는 사회 통합과 조세 형평성 측면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비정상적인 국가채무 구조의 회피: 전시형 재정 운용
전시 국가는 일반적으로 채무를 최소화하고 세입(세금 수입)으로만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쟁 상황에서는 미래의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국가 부채를 늘리는 것에 대한 부담이 크기 때문이죠.
우리나라 정부도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복지를 확대하면서도 직접적인 증세 없이 다양한 벌금, 보험료, 부담금 등으로 재원을 메우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세금 인상이라는 부담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국민들이 체감하는 부담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는 형식적으로는 평화 시대의 조세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국민들이 체감하는 세금 부담은 마치 "조용한 전시" 상황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평화의 탈을 쓴 전시 재정: 왜 이런 구조가 유지되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세금 체계는 형식적으로는 평화 시대의 조세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긴장된 정치·사회 환경을 반영한 전시적 징세 구조를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구조가 계속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부에 대한 신뢰 부족입니다. 국민들이 정부의 세금 사용에 대해 충분한 신뢰를 갖지 못하면, 정부는 직접적인 증세보다는 다양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재원을 확보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둘째, 정책 일관성의 미비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세금 정책이 크게 변화하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세금 체계를 구축하기 어렵습니다. 이로 인해 임시방편적인 세금 정책들이 누적되어 복잡하고 불투명한 세금 체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셋째, 단기적 정치 성과 중심의 재정 운용입니다. 정치인들은 임기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장기적인 재정 건전성보다는 단기적인 정치적 성과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전시 상황에서 긴급하게 재원을 확보하는 방식과 유사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전시세금, 평시의 탈을 쓰다
한국은 평시에 전시세금을 걷고, 복지국가인 척하면서 실상은 전시국가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단지 휴전 중’이기 때문에 전시세금 체계가 유지되는 것이 일면 이해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상속세, 법인세 같은 중요한 조세 이슈들은 정치적 이념 대립의 소재로만 소비되고, 정작 조세정책의 근본적인 기형성에 대한 논의는 깊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국가 채무는 늘 보수적으로 관리하면서, 재정의 부담은 가계부채로 이전시키고, 부족한 세수는 징벌적 과세나 준조세로 메우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꺼내기 힘든 이유는 명확합니다.
증세, 면세자 축소, 복지 효율화 같은 주제는 어느 쪽도 정치적으로 환영받지 못합니다. 모두가 싫어하는 이야기죠. 감정만 상하고, 인기만 깎이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정면 돌파 대신 우회로를 찾습니다. ‘폼은 잡고 싶은데 겁은 나는’ 정치의 방식입니다.
이 글 역시 뾰족한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수많은 분석과 관점에 하나의 새로운 상황 인식을 더하는 것이 언젠가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진짜 위기는 늘 조용히 다가옵니다. 태풍의 눈처럼요.
위기 경보는 처음엔 요란하게 울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듣지 않게 됩니다. 그때가 더 위험합니다. 모두가 위기를 알고 있지만, 이제는 외면하기 시작한 순간. 그때 현실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결국 이건 세금 이야기인 것 같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지금의 사회 시스템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말해주는 신호입니다.
뻔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이야기. 그래서 꼭 꺼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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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