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의학에는 고유한 인체 생리학 이론이 구비되어 있다. 오장육부, 기혈진액, 십사경락으로 대표되는 생리학 이론은 그 자체로도 온전한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생리학 이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세포와 분자단위까지 이론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현대의학의 생리론에 비해 한방의 생리학 이론이 지금 보기에는 소박하거나 거친 느낌이 들어서 그럴 것이다.
각종 기전을 밝히는 논문에서 현란한 각종 지표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저런 체계로 한의학 이론체계를 해석하고 싶기도 하고 실제로 그런 시도가 중요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도에 한계가 있으며 차라리 새로운 과학이론 체계를 기다리는 것이 한의학의 생리 이론을 지금의 언어로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이야기했듯, 의학은 어느 시대에나 유효성과 안전성이 우선이고 기전의 설명은 부차적인 문제다. 미녹시딜의 기전은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별문제 없이 일부에게서 머리털이 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다.
한의학도 마찬가지다. 현재까지 연구로는 항산화, 항염증, 항암, 항균 효과를 중심으로 일부 장내세균총의 조절 작용 정도가 한약의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침자극은 침이 피부를 자극하고 통과하는 자체가 뇌를 자극해서 진통효과를 가져오는 것 하나와, 근신경을 조절하는 작용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근신경 자극의 현상은 근막동통증후군의 이론체계로 상당 부분 설명이 되고, 주슬이하 오수혈이 효과적이라는 현상은 뇌에 보내는 신호의 변조를 야기해 여러 침의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황제내경이 한의학의 생리이론의 상당수를 서술했다고는 하나 서술 당시 음양오행과 인체에 대한 인식의 결합이고, 장부와 경락의 결합은 침의 활용이 중심이 되고 약물 활용에서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상한론은 상한의 변화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하면서 역으로 그 속에 드러난 생리관을 정리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처방을 구성하는 입장에서는 여기서 도출된 생리관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상한론의 생리관은 권순종 한의사가 저술한 의문췌언에서 잘 나타나 있다. 기존의 표, 리, 표리간과 육경의 거친 조합에서 탈피해 순수한 표증과 리증을 따로 분리하고 우리가 접하는 상당수의 환자가 표리 간에 병위가 있다고 정의하였다.
표리 간에서 많은 질환이 나타나고 이를 다시 상초, 중상초, 중하초, 하초로 분리한 것은 독특한 관점이고, 약물 처방과도 일관성을 담보하는 장점이 있다.
이를 참조하여 병위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표증
순수한 표증은 몸이 이전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다 정도이다. 감기가 시작되기 전 몸이 살짝 으슬거리거나 안 나오던 콧물이 느껴지거나 하는 식이다. 이 단계에서는 통상적인 해열제만 복용해도 증상이 심해지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
온병, 특히 섭천사는 전통적으로 표증에 배속시킨 통증을 기경병으로 분리를 했다. 기경병에 들어가는 약과 표증에 들어가는 약이 분리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표증(표리간)에 해당하는 약은 진통의 개념이 약한 편이다.
표리간
우리가 일반적인 한의원에서 보는 대부분의 환자군이다.
횡격막 이상을 상초, 횡격막에서 배꼽까지를 중초, 배꼽에서 장골능까지를 하초로 구분한다.
횡격막 이상은 다시 피부와 뇌, 근골격계가 제1부위, 심폐를 편의상 제2부위라 할 수 있다. 침과 뜸, 추나 등은 제1부위에 국한된다고 보는 것이 좋다. 침이 가장 효과적인 것은 피부와 근골격계 질환이고, 기타 질환, 특히 내과질환은 뇌 자극을 통한 전신 신경 이완의 부수적인 효과로 보는 것이 좋다.
중초는 비위가 중요하다. 전통적인 이론에서는 비위를 같이 보고 비양허를 잡는 데 중점을 뒀으나 온병에서는 비양과 위음을 구분하고 위음허를 잡는 것도 중시한다.
하초는 비뇨생식기와 대장이다. 주로 어혈과 간신음허가 여기서 나타난다. 어혈은 실질적인 어혈과 기능적인 어혈이 있다.
피멍, 점성혈액 등 실체가 확인되는 어혈이 있고 하초 문제와 함께 나타나는 신경정신증상, 월경전증후군, 혈관순환장애가 기능적인 어혈이다.
두 어혈 분류는 상이하면서도 같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실질어혈은 홍화와 소목 등이, 기능어혈은 도인, 목단피를 쓰나 실제 처방에서는 겹치는 경우가 많다.
리증
순수한 리증은 하리청곡이라고 하는 지속적인 설사를 의미한다. 식중독 등 외부의 물질을 배출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가 아니라 인체의 장부기능이 정지되면서 나타나는 일련의 쇠약 증후군이다. 설사 외에도 맥이 가라앉고 느려지는 등 여러 증상이 같이 나타난다. 말기 환자들의 대소변 조절이 안 되는 것의 연장선으로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지금은 심전도나 혈관산소포화도 등 여러 지표가 생명활동을 보여주지만 예전에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관찰할 때 나타나는 증상을 중심으로 파악했고, 하리청곡에 맥이 느려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임종을 앞두었다고 본 것이다.
병성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음양
음증은 한증, 양증은 열증이다.
심박수 상승을 동반하는 일련의 증후군이 열증이고, 그 반대가 한증이라고 볼 수 있다.
체온은 다른 개념이다. 체온의 상승은 병원균 등 외부의 물질에 대한 생명체의 반응이다.
상한론이 중요한 것은 체온의 상승과 맥박수의 상승을 분리한 것이다. 체온의 상승을 열증으로 보고 승기탕을 쓰던 것을 해표라는 별도의 치료법으로 분리한 것이다. 상한론에서 표리를 순차적으로 치료하는 것과 발한법과 사하법의 적응증 구분을 계속 강조하는 이유다.
소음병의 발열을 처리하는 마황부자세신탕이 이를 잘 나타내는 처방이라 할 수 있다.
최근 100년간 미국인의 체온은 점점 낮아졌다고 한다. 병원균이 줄어들고 있다는 반증이면서 암과 치매 같은 불치, 난치의 병이 늘어난 원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수명이 길어져서 안 나타나던 병이 나타났다고 할 수도 있겠다.
체온의 하강은 곧 생명력의 저하를 의미한다. 체온은 항상성 유지가 기본이지 한열을 따라가는 것과는 다른 축이라고 봐야 한다.
허실
내경의 사기가 성하면 실증, 정기가 허하면 허증이라는 정의가 적합하다.
사기는 음식, 대변, 독소, 온도변화 등 인체에서 유래하지 않고 우리 몸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을 통칭하는 말이다.
정기는 오장육부의 정상적인 기능이고, 요즘에는 장내 세균의 다양성도 정기에 포함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정기는 오장육부에 달려있고, 오장육부의 정기는 늘 가득 차있어야 한다는 내경의 언급이 있다. 일부를 없애면 생명력이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요즘에야 간은 30%만 있어도 정상이고, 신장도 하나만 있어도 생활이 가능하며 폐도 필요시 일부 절제를 하게 된다고 하지만, 장기이식 후 5년 생존율이 많이 높아져서 70%대인 것을 감안하면 오장을 혹사시키는 것만큼 장수에 안 좋은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장은 외부와 분리된 체계이고, 이 오장의 정기를 떨어뜨리는 가장 확실한 원인은 칠정상이다. 칠정은 오장에 들어있는 데, 칠정의 표현이 적절하지 않으면 오장을 혹사시키는 것과 같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고, 칠정의 요즘 표현이 스트레스다. 꼭 오랫동안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질병으로 변하는 것을 예로 들것도 없이 40대 이하의 주요 사망원인이 삶을 비관한 자살인 것을 보면 칠정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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