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액은 정, 기, 신 등 한의학 생리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시된 경향이 있다.
동의보감부터 정기신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진액은 땀에 한정해 서술을 했다. 신장이 액을 주관한다는 이론적 근거가 있음에도 적응증을 좁혀 놓은 것이다.
치료법으로도 자한에는 익기고표를 목표로 황기제를, 도한에는 청열제가 위주이고, 진액 보충은 거의 없었다. 인식의 한계와 함께 숙지황말고 마땅한 보음제가 없던 것도 원인이다.
동의보감뿐만 아니라 온병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대부분 의가들은 진액을 보존하는 치료법에 관심이 적었다. 진액의 문제는 부차적인고,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면 진액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이라 본 것이다.
농업 사회에서는 해가 떠 있을 때만 일을 할 수 있고, 해가 지면 잠을 자거나 쉬어야 했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공업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해가 지면 집에 와서 쉬다가 저녁 9시쯤 자서 새벽 1시에 깨었다가 다시 자서 아침 5시쯤 일어나는 것이 일상이었다.
수면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에 진액 문제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업과 공업, 무역이 발달하면서 대도시들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생활환경은 급변하게 된다. 해가 떠야만 일을 했던 시대에서 해가 져도 일을 할 수 있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온병이 태동한 중국 양자강 이남은 18세기에는 이미 상업이 크게 번성하고 현대와 같은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스트레스와 수면부족, 자극적인 음식과 같은 현대인들과 비슷한 환경에 노출된 사람들이 늘어났고, 기존의 처방으로는 효과를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졌다.
온병은 이러한 환경에서 기존 치료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진액의 보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한열허실을 먼저 맞춘 후 진액을 따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진액 보존에 유리한 중재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다.
온병학이 널리 퍼질 당시에도 이 관점은 새로운 편이었고, 특히 우리나라처럼 보양제를 선호하는 분위기에서는 지금도 낯선 개념이다.
그럼에도 진액의 보존을 강조해야 하는 것은 현대의 만성 질병 상당수가 진액의 문제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진액은 혈과 음액의 재료이며, 여기에는 호르몬, 점막, 뇌척수액, 세포간질액 등이 포함된다. 범위를 넓게 잡으면 장내 세균 또한 진액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세균은 수분이 있어야 생존하기 때문이다.
위암, 대장암 등 상당수의 암이 점막에서 발생하고, 치매는 뇌척수액의 순환 문제가 원인이라는 연구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고혈압은 간음 부족으로 간풍이 안에서 일어나 발생하는 기전으로도 해석한다. 당뇨에 다량의 숙지황을 쓰는 것 또한 진액 부족이 원인임을 시사한다.
처방을 구성하다보면 처음에는 한열을 분별하는 데 역량을 집중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조습의 문제로 들어간다.
그동안 많은 의가들이 조습을 조절하는 문제에 대해 중요성은 인식했지만 어떻게 처방에 적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상세한 연구가 없었다.
습은 그나마 담음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맞출 수 있었지만 조증에 대해서는 음허와 조증 고유의 증후군을 구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필자는 음허는 세포나 장기, 혈액 실질의 문제, 조증은 점막과 체액의 문제로 구분하고 있다. 조증과 음허가 겹칠 가능성이 높으며, 조증이 음허에 선행한다고 보는 편이다.
예를 들어 알츠하이머에서 뇌척수액의 순환 문제는 조증의 범주로, 이게 지속되어서 뇌실질의 위축이 오는 것은 음허로 보는 것이다.
조증은 현재의 인류가 앓고 있는 여러 질환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이며, 치미병의 관점에서도 예방차원에서 개입하는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은 다른 유인원에 비해 물을 적게 쓰고도 생존할 수 있도록 진화해 왔다. 적은 수분으로도 대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진화해왔고, 이는 인간이 극지부터 열대지역까지 다양한 기후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반대로 말하면 수분의 부족은 인간의 신진대사에 다른 동물들에 비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도 볼 수 있다.
진액론은 연구가 된 부분보다 앞으로 연구할 내용이 더 많은 분야다. 이론의 충실화뿐만 아니라 실증연구에서도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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