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을 해석하는 방법은 다양한가?
몇천 년간 인류의 수많은 시도와 연구가 농축된 한약, 본초를 일이관지할 수 있는 이론체계가 있을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개화기 이전에는 당연히 기미론, 귀경을 중심으로 한 효능주치만이 인정받는 체계였다면 그 이후 생의학, 세균학, 세포학, 분자생물학, 유전자 등 여러 학문과의 교류를 통해 기미론은 고리타분한 옛날 체계로 인식되어 왔다.
적응증과 이에 분명히 대응하는 약이라는 개념은 한약 개념에서 없지는 않았으나 단일물질로 효능을 구성하는 양약에 비해서는 그 기전이나 내용이 부족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두가지를 시도했다. 하나는 생의학 질병명과 적응증에 한약을 중재 방법으로 붙이는 것이다. 흔히 양진한치라고 하는 방법이다.
상한론의 발황을 황달로 대응한 후 인진호가 군약인 약이 적응증이라고 하는 개념이다. 일부는 잘 들어맞겠지만 대부분은 실패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생의학의 질병 규정과 한의학의 질병 규정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양방처럼 적응증을 매우 좁히고 그에 대응하는 한약을 짝짓는 방법이다. 약징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한약자체가 단일성분이 아니며, 매우 다양한 물질이 다양한 특성을 지닌 인체에 대응하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도 한 때의 관심으로 마무리되었다.
적응증과 중재의 세밀한 짝짓기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다. 현실은 대부분 양방 질환이나 증상군에 무슨 처방이 좋을지에 대한 거친 매칭이거나 아니면 사상처방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한약을 포함한 한의약 중재의 최종 목표는 음양허실의 교정이다. 이 음양허실은 질병보다 더 상위에 있는 개념이다.
음양허실이 질병보다 상위에 있기 때문에 질병이 생기기 전 예방을 하는 약과 치료를 하는 약이나 수단이 크게 차이가 없다.
음양허실을 교정하는 수단 중 하나인 한약도 이 체계에 맞춰서 발전했다.
해표제, 거풍제, 보음제, 보양제, 보기제, 보혈제, 사하제, 이기제 등의 약물 구분이 음양허실에 대응되는 것이다.
사람이 먹을 수 있고 효과적인 약물은 여러 경험이 누적되면서 판별이 된다. 남는 것은 이 약물을 다시 효능군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 효능을 분류하는 방법에는 형상론, 기미론, 생장 환경론에서 심지어는 주역이나 운기를 포함하는 의철학까지 다양하게 있다.
그중 임상과 가장 현실에서 맞는 것이 기미론을 중심으로 형상론 일부를 도입한 것이다.
기미론에 대한 비판 중 하나가 수많은 약재를 기미론으로 분류하면 중복되는 분류가 많다는 것이 있다.
지구 상의 모든 식물을 분류하면 그 말이 맞지만, 사람이 약으로 쓸 수 있는 약이 발견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대부분은 식물은 효능이 없거나 독성이 강하다. 일부만 안전성과 유효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약전에 실린 약재가 500가지 정도 되지만 정작 쓰는 약은 100가지 이내이고, 그중 가장 많이 쓰는 약을 20-30가지를 넘기가 힘들다.
인류가 1만 년 전부터 먹을 수 있는 동물이나 식물이 지금과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약도 마찬가지다. 기후를 포함한 생장환경에 좌우되며, 안전성과 유효성, 개체의 풍부함 등을 만족시킬 수 있는 약이 생각보다 많이 없다.
본초강목에 1800가지, 중화본초에 9000가지 항목이 실려있다고 하지만 와닿지 않는 것도 인간의 인식 체계에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기미론이 이미 임상의 현상을 이론에 맞춘 것이고 실질적인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에서 이론이 생기는 것은 모든 이론의 특성이다. 이론은 실제를 모두 담을 수도 없다. 변하지 않는 이론을 법칙이라고 한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대표적이다. 이런 법칙들도 학문의 발전에 따라 다른 법칙에 자신의 영역을 내어준다.
기미론은 이론체계이니 당연히 완벽하지 않다. 기미론이 과학의 다른 분야들과 교차검증을 통과한다면 법칙의 자리에 오를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기미론은 그래도 다른 이론에 비해 임상현장에서 처방 구성을 할 때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이론이고, 형상론과 약재의 고유 특성을 조합하면 대부분의 한약처방을 해석하는 도구로서는 기능할 수 있다.
명의로 이름난 의가들은 기미론에 충실했다. 섭천사는 임증지남의안에서 기미론에 근거해 온병의 처방을 구성했다.
이제마도 기미론으로 보면 신온지제는 소음인, 고한지제는 소양인, 감한지제는 태음인, 산온지제는 태양인의 처방으로 구성했다.
다만 기미론의 한계도 있다. 기미론에 충실하게 되면 반대 성향의 기미가 섞이는 처방을 구사하기 어렵다. 이제마가 보중익기탕에서 시호 승마의 찬약재를 곽향 소엽의 따뜻한 약재로 바꾼 것이 대표적이다.
육미나 팔미 또한 약재가 다른 성질이 섞여 있고, 장경악은 이것을 분리해 좌귀음, 우귀음으로 창방을 했다.
그럼에도 임상현장에서는 기미론에 충실하게 새로 구성한 처방보다 기미가 섞인 처방이 더 많이 쓰이고 있다.
명방들은 기미가 섞여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계지탕부터가 계지의 온성과 작약의 차가움이 함께 있고 사심탕도 마찬가지다.
기미론은 오래된 이론이다. 그러나 막상 기미론으로 어떻게 처방을 이해하고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지식만이 알려져 있고 세밀하고 체계적인 구성은 연구를 해야 하는 시점이다.
한약을 구성하는 다당체나 성분의 특성이 기미론, 특히 맛과 연관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보면서 기미론의 발전을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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