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은 더 이상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고 이전에 썼던 글이 있습니다. 의사수 정원을 늘리는 정책을 쓸 것이라고 봤는 데, 지금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에 이번 글에서는 국민건강보험(이하 '건보')가 유지불가능한 다른 이유를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의대증원 이슈와 맞물려 뒤로 숨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건보 재정의 고갈입니다. 지금은 의사들이 파업을 하고 있어 의료비를 지급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공단')에서는 표정관리하기 바쁠 것입니다. 치료를 하지 않으니 보험 청구를 하지 않아 재정이 남기 때문입니다. 대놓고 이야기는 못해도 파업이 지속되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재정이 고갈되면 보건복지부, 건보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의 역할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건보가 유지불가능한 이유가 최근에 하나 더 생긴 것 같습니다. 바로 퇴직연금입니다. 우리나라는 국민연금이 생겼을 때부터 노후의 소득대체율이 낮았습니다. 쉽게 말해 나이 들어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에도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연금을 주지 못했습니다. 경제성장이 지속되면서 그 가능성을 엿보기도 했지만, 저출산과 고령화, 저성장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게 되었고 연금개혁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연금을 당장 받아야 할 세대에서는 더 내고 더 받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면 지금 20대들은 소득의 절반가까이를 연금으로 내야 하지만, 당장 노후 대책이 막막한 50대 중장년층도 녹록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세대 갈등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정부가 연금 지급을 보장하고 있지만, 여기에 대한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
낮은 소득대체율로 인해 퇴직을 앞둔 개인들은 부동산을 매입해 세를 놓아서 수입을 얻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마저도 코로나 이후 고금리와 인구감소로 인해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일을 하는 동안 열심히 납입을 해서 노후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부동산가치는 떨어지고, 주식투자는 무서우니 남는 것은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하는 주택연금과, 가장 소득이 많을 50대 때 들어 놓는 퇴직연금이 현재로서는 노후대책의 대부분을 차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택연금은 9억 이하의 집에 대해서만 적용이 되니 소득이 있다면 얼마 되지도 않은 국민연금에 퇴직연금을 붙여 생활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노후 대책입니다.
여기에는 복병이 있습니다. 바로 건강보험료입니다. 이미 국민연금은 건강보험료를 산정하는 기준이며, 개인형 퇴직연금(IRP)는 아니라고는 하지만 완전하게 배제시키지 않았습니다. 건보 재정은 고갈을 향해 가는 데, 가장 의료비 지출이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지 않고서는 유지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건보료 산입 기준에 퇴직연금을 넣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빡빡한 노후 자금이 줄어들게 됩니다. 아무리 고령층이 병원 이용이 많다고 하지만, 병원을 모든 사람이 고르게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금수급자 사이에서도 건보료를 의무적으로 징수해야 할지에 대해 반발이 생길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도 가장 표를 많이 가진 집단이기 때문에 연금과 건보료 중 연금을 선택하게 된다면 이에 맞춰서 법령이 바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결과들이 예측될까요? 몇가지 가능한 것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의료저축제도의 도입
오래전부터 언급되던 제도인데, 되려 최근에 고물가와 실손보험 보장 축소로 개인들이 의료비 통장을 만들어 쓰고 있는 것이 기사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몇몇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의료저축제도는 의료비 목적으로만 쓸 수 있는 통장을 만들고 여기에 납입을 해서 필요할 때마다 사용하는 것입니다. 해당 통장에 대해서는 각종 세제 혜택을 부여하며, 차압도 금지하여 필요할 때 치료를 받도록 합니다.
https://biz.chosun.com/stock/finance/2024/04/28/7NG75UXUU5GFLNWKURALU6Z4VU/
이 제도의 가장 큰 장점은 의료 이용을 자발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의료비가 자신의 통장에서 나가기 때문에 정말 아프거나 하지 않으면 소위 '의료쇼핑'을 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공공의료기관의 비중, 본인부담금 등 우리나라에 맞게 설계한다면 바로 도입될 수 있는 제도 중 하나입니다. 정말 큰돈이 들어가는 중증에 대해서만 국가가 보장하고, 경증이나 가벼운 질환에 대해서는 의료저축제도를 활용할 것입니다. 이는 필수의료의 보장으로 발생하는 경증 치료 축소를 자발적인 선택의 영역으로 변경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2. 의원급 의료 이용 축소
1번과 연계되기도 하고, 필수의료 강화 움직임에 가장 먼저 나타날 현상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의료기관은 크게 의원급, 종합병원, 상급 종합병원으로 되어 있는 데, 정부에서 저수가로 국민건강보험을 운영하기 때문에 건보 보장이 되는 치료로는 의료기관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의원급은 실비와 미용, 상급 종합병원은 대규모 외래 흡수와 전공의 활용이었습니다.
요양급여 지급액을 보면 의원급, 종합병원, 상급 종합병원이 비슷한데, 필수의료를 하는 종합병원 이상의 병원에 자원을 몰아주면 필연적으로 의원급으로 가는 돈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의원급에서는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거나 규모를 팍 줄여서 유지비를 낮추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마저도 정부에서 까다롭게 보험료를 지급해서 동네의원이 절반 이상 없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빈자리는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약국에서 파는 약으로 유지하거나 비대면진료로 해결하려는 것이 정부의 생각으로 보입니다.
3. 건보재정 기금화를 통한 비용 절감
인구감소의 현실화로 모든 수단을 다 써야 하는 시점이며, 건보료를 올리기 쉽지 않다면 국고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현재는 상한선인 20%를 다 안 받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보건복지부보다 힘이 센 기획재정부의 눈치를 보기 싫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재정 고갈보다는 국고 지원이 낫기에 어느 시점에서는 국고지원 상한을 채우고 국회 예산 심사를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보건복지부와 의사단체들, 가입자단체들과 건강보험공단만 참여해서 건보료 부과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국고 지원이 늘어나면 국회로 건강보험 예산 심사가 넘어갈 것입니다. 건보공단과 심평원의 역할이 위축되고, 연간 2조 원 가까이 쓰는 두 기관의 축소도 논의될 것입니다. 아예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고, 공단과 심평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운이 좋으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보좌관으로 가거나 자연스럽게 커질 민간보험 회사로 이직하는 수순을 밟을 것입니다.
지금의 건강보험제도는 경제성장, 인구증가를 전제로 설계된 제도입니다. 지금 내가 내는 돈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내도록 한 것인데, 저성장, 인구감소를 맞닥뜨린 지금 제도의 궤도 변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지금 제도를 어떻게든 고쳐 쓰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나 곧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급격한 변화가 올 것입니다. 의대정원이슈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지만, 그 뒤에는 건강보험제도의 대변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회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민건강보험의 종말 (3) - 공공영역의 축소 (0) | 2024.05.03 |
---|---|
다시 돈 내고 보는 신문의 시대 (1) | 2024.05.02 |
2027년 중국의 대만침공이 우리에게 미칠 영향 (0) | 2024.04.25 |
자산가치 평가절하의 시대, 무형자산이 더 걱정인 이유 (0) | 2024.04.10 |
의사들은 파업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0) | 2024.02.07 |
한의학(특히 온병학), 사회문제, 경제경영 분야에 대해 글을 쓰는 한의사입니다.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펼쳐놓는 공간입니다.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