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도 '징세청부업자'로서 가혹하게 세금을 착취했던 과거를 덮어주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부터 천국에 가기 어려운 직업으로 언급될 만큼,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사적 이익을 위해 국민을 압박했던 '세리(稅吏)'는 역사적으로 증오와 개혁의 첫 번째 대상이었습니다.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통해 유럽의 근대 국가들은 세금 징수를 사적 이익이 개입할 수 없는 국가 시스템 안으로 완전히 편입시켰습니다. 징수 과정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할 유인을 원천적으로 제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이 악명 높은 세리의 모습이 법 조항 속에서 여전히 발견되고 있습니다. '성과급'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세리의..

정답 사회의 성공, 그리고 명백한 한계 지방 소멸과 인구 감소라는 사회 변화는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정부가 수백조 원을 투입하고 전담 부서까지 만들며 이 문제와 씨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백약이 무효라는 냉소 섞인 공감대만 남았습니다. 이제는 '다른 나라도 인구가 준다더라', '일본 빈집 문제에 비하면 우리는 낫다'는 식으로 체념 섞인 적응을 모색하는 분위기마저 감지됩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수단이 모두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문제의 근저에 깔린 우리 사회의 운영 체계, 즉 '사상'을 점검해야 합니다. 제 진단은 한국 사회가 사상의 발전 단계에서 아직 모더니즘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은 종교와 왕권이라..

질병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했고, 인간의 변화는 곧 질병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기후변화, 기술발전, 사회체제의 변화는 인류의 삶을 바꾸었고, 질병의 양상 또한 그 흐름을 같이했습니다. 특히 최근 100년간의 변화는 이전 수천 년을 압도할 만큼 거대했으며, 질병의 형태와 이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 역시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현대 보건의료의 패러다임을 '확정적 치료(Definitive Treatment)'와 '확률적 건강관리(Probabilistic Health Management)'라는 두 가지 분석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확정적 치료가 원인이 명확한 질병을 진단하고 표준화된 방법으로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확률적 건강관리는 명..

정부출연연구원(이하 '정출연')의 숙원이던 PBS(Project-Based System)가 폐지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정출연이 정부의 돈을 받아 운영되는 사실상 '정부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각 연구원들이 외부 과제를 수주해서 스스로의 연구비를 충당해야 하는 PBS는 1996년부터 도입되었으니, 한 세대인 30년 가까이 되어서야 폐지가 되는 것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PBS가 폐지되자 이에 대한 환영의 글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이 과제 수주와 행정에만 몰두하게 만들고 정출연의 고유한 역할을 막은 PBS가 없어졌으니 좋다는 내용이고, PBS를 대체하는 새로운 평가기준의 필요성도 언급하는 내용들입니다. 저는 PBS가 없어지고 나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왜 PBS라는..

예약 필수 식당에서의 당황스러운 경험 점심 쯤 식사할 곳을 알아보기 위해 네이버 맵을 켰습니다. 주위에는 3만원대에 좋은 등급의 참치와 함께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비즈니스 호텔 지하에 있어서 한번씩 지나던 곳인데, 그곳 지하에 있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여튼 가봅니다. 1층 계단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 A형 입간판이 등장합니다. '저희 식당에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식사를 하실 수 없습니다. 30분 전에는 예약을 해주셔야 식사가 가능합니다'라고 건물 벽면 간판보다 더 잘 보이게 표시를 해놨습니다.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지하로 내려갑니다. 입구에 들어서니 직원들도 바쁘고, 룸으로 이뤄진 식당인데도 수많은 손님들의 대화 소리가 웅성웅성 전해져 들립니다. 홀 직원의 ..

유목민적 유연성의 시대'시스템이 엉성하다', '변화가 급격하다'는 평가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였습니다. 다른 선진국들이 견고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동안, 한국은 마치 유목민처럼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정권 교체 시마다, 때로는 한 정권 내에서조차 조세·교육·복지·국방 등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정책들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었습니다. 국민들은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정부가 뭔가 일하고 있다'는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이기도 했으며, 이는 분명 한국 사회만의 뛰어난 적응력이자 유연성으로 작용하였습니다.하지만 이 유연성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한 정권에서 추진한 정책이 다음 정권에서 완전히 폐기되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과 불..

한국 의료의 딜레마: 낡은 규제가 만든 새로운 현실대한민국 의료 체계는 ‘당연지정제’, ‘비영리 의료기관’, 그리고 ‘1인 1개소법’이라는 세 가지 핵심 규제를 기반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흔히 ‘의료 3불 정책’이라 불리는 이 제도들은 의료의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 마련되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그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국 의료의 고질적인 문제들은 이 낡은 규제와 깊이 얽혀 있습니다. 기형적인 당연지정제와 그 그림자당연지정제는 한국 의료의 가장 특징적인 제도입니다. 모든 의료기관은 국민건강보험(이하 건보) 진료를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이는 국민의 의료 접근성을 보장하고, 환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의료기관이 건보 진료를 통해 받는 수가가 원가에..

당연지정제, 이제는 논의할 때입니다당연지정제는 국민 대부분에게 생소한 단어입니다. 의료기관을 운영하거나 정책에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니라면 처음 듣는 제도일 수도 있습니다. 의료계 종사자조차도 '그런 제도가 있다'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이 제도가 보건의료 체계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깊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하지만 당연지정제는 한국 건강보험의 핵심 구조이며, 현재 의료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제도입니다.당연지정제란 무엇인가?당연지정제는 모든 병원과 의원, 약국이 국민건강보험 진료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제도입니다. 덕분에 국민 누구나 전국 어디서든 건강보험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한국은 의료 접근성과 비용 측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우수한 의료체계..

성수동에 다녀왔습니다. 여전히 젊은 친구들이 모이고, 감각적인 가게들이 자신의 색깔을 내는 곳이었습니다. 예전에 자주 가던 신기한 물건 많이 가져다 놨던 문구점은 이제 건물 전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는 같은 노트인데도 국산 제품이 일제보다 비싸게 팔리는 저로서는 낯선 장면도 목격했습니다.이번 방문은 생맥주 팝업 스토어 때문이었는데, 앉는 자리는 없고 서서 마시는 구조였습니다. 인당 세 잔으로 제한되어 있어 금방 마신 뒤, 위스키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에서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흥미로웠던 건 시간대였습니다.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거리의 불이 하나둘 꺼지고, 대부분의 가게가 이미 영업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지금이 가장 북적였을 시간이었고, ‘젊음의 거리’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십신과 전통적 길흉 개념의 이해사주명리학을 공부하시는 분들께서는 길신(吉神)과 흉신(凶神)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일간(日干)을 중심으로 다른 오행을 음양으로 구분하여 사회적인 관계를 규정한 것을 십성(十星) 또는 십신(十神)이라고 부릅니다. 십신은 부모, 형제, 배우자, 자식과 같은 가족관계를 정의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를 살아가는 수단과 방식을 규정하기도 합니다. 흔히 고위 공직에 순조롭게 오르는 사람에게 '관성(官星)'이 잘 갖춰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십신은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비견(比肩): 자신의 동료나 협력자겁재(劫財): 재물을 급하게 취하려는 행위나 투기심. 경쟁자.식신(食神):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생산수단상관(傷官): 특수하고 창의적인 생산수단이면..